Thursday, July 31, 2014

I-20



내 고향 142가 517번지

내 고향  142가 517번지.



517 West 142nd St. NY, NY 10031.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미국 주소다.  
그 집은 브로드웨이 선상에서 동쪽으로 몇 걸음 안 쪽에 있었고, 거기서부터 두어 블럭 서쪽으로 허드슨 강이 흐르고 있다. 그 허드슨 강이 내게  특별한 구실을 해주었다.  강 이름을 궁여지책으로 써 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브로드웨이가 바로 앞에 있고 거기서 쭉 걸어가면 허드슨 강이 나와.맞는 말이지만, 뉴앙스는 무척 달랐다. 
그 유명한 42가 브로드웨이에서 100블럭을 북쪽으로 올라 온 142가 브로드웨이는 딴 세상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거리에 어슬렁거리며 바로 옆 암스테르담 에브뉴는 폐허 그 자체이다. 나이 30에 친구 찾아 뉴욕엘 온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기상천외한 동네였다. 이름하여 스패니쉬 할렘이었다. 
허드슨(HUDSON)! 얼마나 낭만적인 이름인가. 맑고 순수한 자연과 예술적인 품위가 느껴진다.  선망의 눈으로 나를 떠나 보냈을 내 가족과 친구들이 편지를 읽으며 과연 노려가 멋진 뉴욕엘 갔구나하고 부러워하길 바랬다. 
아니 그 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라도 브로드웨이 하면 네온 싸인이 휘황찬란한 뮤지컬을 떠올릴 것이고, 허드슨 강이라고 하면 빠리의 세느의 분위기를 연상하겠지하는 바램이었다. 
방이 많으니까 염려 말고 오라고 한 친구 원숙이 말대로 5층 브라운 스톤 빌딩에 방은 참 많았지만, 방 다운 방은 하나도 없었다. 지하실부터 옥상까지가 공사 중이었다. 예쁘게 꾸며진 내 방에서의 감격도 잠시, 그 방은 며칠 후에 헐리고 나는 짐을 싸들고 다른 층의 다른 방으로 옮겨야 했다.
나는 편지마다 허드슨 강 말고도  ‘만하탄 거리에는 밍크 코트를 입은 멋진 남성들이 활보를 한단다.’ ‘거리 모퉁이 마다 쥴리아드 학생들이 바이얼린을 켜고 노래를 불러.’ 멋지게 들리는 말을 골라서 썼다. 한국에 보낸 편지가 실히 한 뭉치는 될 것이다. 지금도 그 주소를 외우고 있으니 말이다.
시끄럽던 거리와 횟가루가 뒤덥혀 어수선하던 브라운스톤 원숙이의 집에 살던 그 여름 뜨거운 열기까지도 생생하다. 지하실 부엌에서는 나 말고 그 집에 살던 신학생 부부, 뉴욕에 반해 주저 앉은 화가, 뿐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드나 들던 뉴욕의 예술인들로 늘 와글거려다. 그 때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해 내던 그 시간들이 내 마음 속에 겹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곳을 떠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 허드슨 강변에 살고 있다. 142가에서 곧장 한 100 블럭 정도 더 북쪽으로 간 우리 동네에서도 10분이면 허드슨 강가로 갈 수 있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교회를 다녔고, 여름이면 애들이랑 강가의 공원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이렇게 한가한 동네에 살면서도 강을 지긋이 바라보는 한가로운시간을 가져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그 때와 마찬가지다. 다만 뉴욕에 첫 발을 디딘 그 곳이 그리움으로 떠 오르곤 하는 것이 달라졌다.
138가에서 버스를 내려 전화를 하면 신학생 아저씨가 개를 끌고 나를 데리러 오던 그 거리가, 내가 살던 명륜동 창경원 뒷담길 처럼, 개천물 소리 시원하던 정능 골짜기처럼, 무거운 책가방 몸이 휘어지게 들고 걷던 효자동 길처럼 오로지 정겨움으로만 남아 있다.
아직도 내 땅 같지 않은 미국에서, 어느 새 142가 517번지는 내 고향이 되어가고 있다.

Wednesday, July 30, 2014

흰 테두리 빨간 튜울립




나를 뉴욕에 도착한 첫날 밤으로 되돌려 준 것은 작은 튜울립 그림이었다. 황규백 씨의 튜울립 꽃 판화에서 한 세월 전 그 날 밤이 되 살아 났다.


미국에 ‘한번 가볼까’ 마음을 먹은 것은, 지방 대학 선생 노릇을 하다가 고속버스 타는 일에 싫증이 날 즈음이었다. 친구 원숙이가 번번히 미국에 오라고 했었지만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미국물을 먹으면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주먹구구로, 뉴욕엘 왔다. 비행기 타야 가나보다 하던 시절이라 큰 기대를 안했는데 노처녀에게는 잘 안 준다는 비자가 즉석에서 나왔고, 홀트 아동기관을 통해서 비행기 표를 반 값으로 사고는 얼떨결에 비행기를 탔다.


말이 안 통하는 캐나다인 신부랑 둘이서 역시 말이 안 통하는 입양아 세 명을 맡았다. 신부님이 자기는  남자 아이를 맡겠다고 해서, 왕왕 우는 서 너 살짜리 여자애와 갓난 애는 내 차지가 되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뒷 자석에서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여자 애를 달래주고 멕여주고 재워주고 동시에 어린 애기 기저기를 갈아 주고 젖병 물려 줬다. 승객들이 불쌍한 눈길로 ‘쯔쯔’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 같았다.


케네디 공항에서 아이들을 미국 사람들에게 넘겨 줄 때에는 속이 다 시원했다. 제일 늦게 나오는 나를 양손 흔들며 맞이하는 친구를 봐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차 속에서 ‘ 저기가 맨해튼이야’, ’저기가 양키 스테디움이야.’하면 고개를 돌리기는 했어도 건성으로 '으응'할 뿐이었다.
하이웨이를 달리고 또 달려 어두운 길거리들어서서도 한차 만에 도착한  곳은 어두컴컴한 골목이었다. 누런 가로등 불 빛에 드러나 보이는 건물들이 으시시했다. 원숙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맨해튼 142가에 100년 된 낡은 브라운 스톤 건물을 사서 남편이랑 직접 고치고 있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 잘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벽도 문도 모두 히끗히끗 칠이 베껴진 검정색이었다.


우리는 삐걱 거리는 어두운 층계를 짐을 들고 4층까지 올라가 어느 방 앞에 멈추었다. 원숙이가 문을 활짝 열자 눈 앞에 완전히 딴 세상이 나타났다. 환한 불빛에 향내까지 풍기는 그림같은 방이다. 편지에 ‘네 방을 만들어 놨어’했던 그 ‘나의 방’ 이다. 사방 벽 면에는 보라빛 은행 잎이 바람에 날리듯 가득히 그려져 있었고, 한 옆에는 옅은 주황색조의 침대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높은 천정에서 길게 내려 뜨려진 우유빛 레이스 커텐 앞에는 튜울립 한 송이가 작은 유리병에 꽂혀 있었다. 
빨간색 꽃 송이의 가장자리가 하얀색으로 둘려 진 생전 처음 보는 튜울립이었다.


현관문을  X자로 막은 판자떼기를 뜯어 내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치우면서 수도 전기 공사부터 했다는 그 혼란 통 속에서, 벽에 벽지를 바르고 그림을 그리고 향수 쌤플 종이를 갖다 놓으면서, 원숙이는  내가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을 상상했을 것이다. 내가 놀라고 감격했기에 원숙이는 기대했던 보람을 느꼈으리라.
그날 밤 나는 밀크 박스 위에 판데기를 올려 놓아 만든 간이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물론 그 후로도 이 튜울립 꽃을 여러번 봤을 테지만, 인생의 발란스를 잡는 줄타기에 정신 없이 살다가 어느 갤러리 주인한테서 선물 받은 황규백 씨 작은 그림에서 바로 그 날 밤 내방에 꽂혀있던 그 튤울립과 재회를 했다.
그림 속에서도 창가에  놓여진 튜울립 한송이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뉴욕의 첫 날 밤을 되살아나게 해준 것이다. 몸과 마음이 파김치 되었던 그 순간에 나는 분명히 이 이국적인 꽃을 보면서 “ 아, 이쁘다.’라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그 찰라에 어쩌면 형용 할 수 없는 한줄기 희망을 품었을 수도 있다.

황규백씨 튜율립 꽃에서 그림 그리는 원숙이가 연결이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것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이 어느 순간 기묘하게 그들과 연결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인생은 이렇게 신비스럽게 엮어지는 멋으로 살아지는게 아닌가.
지나가 버린 한 순간을 그대로 품고 있는 이 그림은 항상 내곁에 있다. 꽃잎 끝을 흰 페인트로 슬쩍 터치한 빨간색 튜울립 그림은 친구 하나 믿고 무작정 비행기를 탄 나의 시들지 않는 우정으로 항상 피어있다.




Monday, July 28, 2014

2011년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문인극 대본/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등장인물 :   앙드레 지드, 나레이터, 시인 1, 2, 3, 4, 5, 6 …가수, 무용수 장면 :   거리의 카페 …테이블, 의자, 가로등… 정원 ….꽃, 화분, 벤치  숲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