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뉴욕에 도착한 첫날 밤으로 되돌려 준 것은 작은 튜울립 그림이었다. 황규백 씨의 튜울립 꽃 판화에서 한 세월 전 그 날 밤이 되 살아 났다.
미국에 ‘한번 가볼까’ 마음을 먹은 것은, 지방 대학 선생 노릇을 하다가 고속버스 타는 일에 싫증이 날 즈음이었다. 친구 원숙이가 번번히 미국에 오라고 했었지만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미국물을 먹으면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주먹구구로, 뉴욕엘 왔다. 비행기 타야 가나보다 하던 시절이라 큰 기대를 안했는데 노처녀에게는 잘 안 준다는 비자가 즉석에서 나왔고, 홀트 아동기관을 통해서 비행기 표를 반 값으로 사고는 얼떨결에 비행기를 탔다.
말이 안 통하는 캐나다인 신부랑 둘이서 역시 말이 안 통하는 입양아 세 명을 맡았다. 신부님이 자기는 남자 아이를 맡겠다고 해서, 왕왕 우는 서 너 살짜리 여자애와 갓난 애는 내 차지가 되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뒷 자석에서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여자 애를 달래주고 멕여주고 재워주고 동시에 어린 애기 기저기를 갈아 주고 젖병 물려 줬다. 승객들이 불쌍한 눈길로 ‘쯔쯔’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 같았다.
케네디 공항에서 아이들을 미국 사람들에게 넘겨 줄 때에는 속이 다 시원했다. 제일 늦게 나오는 나를 양손 흔들며 맞이하는 친구를 봐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차 속에서 ‘ 저기가 맨해튼이야’, ’저기가 양키 스테디움이야.’하면 고개를 돌리기는 했어도 건성으로 '으응'할 뿐이었다.
하이웨이를 달리고 또 달려 어두운 길거리들어서서도 한차 만에 도착한 곳은 어두컴컴한 골목이었다. 누런 가로등 불 빛에 드러나 보이는 건물들이 으시시했다. 원숙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맨해튼 142가에 100년 된 낡은 브라운 스톤 건물을 사서 남편이랑 직접 고치고 있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 잘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벽도 문도 모두 히끗히끗 칠이 베껴진 검정색이었다.
우리는 삐걱 거리는 어두운 층계를 짐을 들고 4층까지 올라가 어느 방 앞에 멈추었다. 원숙이가 문을 활짝 열자 눈 앞에 완전히 딴 세상이 나타났다. 환한 불빛에 향내까지 풍기는 그림같은 방이다. 편지에 ‘네 방을 만들어 놨어’했던 그 ‘나의 방’ 이다. 사방 벽 면에는 보라빛 은행 잎이 바람에 날리듯 가득히 그려져 있었고, 한 옆에는 옅은 주황색조의 침대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높은 천정에서 길게 내려 뜨려진 우유빛 레이스 커텐 앞에는 튜울립 한 송이가 작은 유리병에 꽂혀 있었다.
빨간색 꽃 송이의 가장자리가 하얀색으로 둘려 진 생전 처음 보는 튜울립이었다.
빨간색 꽃 송이의 가장자리가 하얀색으로 둘려 진 생전 처음 보는 튜울립이었다.
현관문을 X자로 막은 판자떼기를 뜯어 내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치우면서 수도 전기 공사부터 했다는 그 혼란 통 속에서, 벽에 벽지를 바르고 그림을 그리고 향수 쌤플 종이를 갖다 놓으면서, 원숙이는 내가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을 상상했을 것이다. 내가 놀라고 감격했기에 원숙이는 기대했던 보람을 느꼈으리라.
그날 밤 나는 밀크 박스 위에 판데기를 올려 놓아 만든 간이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물론 그 후로도 이 튜울립 꽃을 여러번 봤을 테지만, 인생의 발란스를 잡는 줄타기에 정신 없이 살다가 어느 갤러리 주인한테서 선물 받은 황규백 씨 작은 그림에서 바로 그 날 밤 내방에 꽂혀있던 그 튤울립과 재회를 했다.
그림 속에서도 창가에 놓여진 튜울립 한송이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뉴욕의 첫 날 밤을 되살아나게 해준 것이다. 몸과 마음이 파김치 되었던 그 순간에 나는 분명히 이 이국적인 꽃을 보면서 “ 아, 이쁘다.’라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그 찰라에 어쩌면 형용 할 수 없는 한줄기 희망을 품었을 수도 있다.
황규백씨 튜율립 꽃에서 그림 그리는 원숙이가 연결이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것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이 어느 순간 기묘하게 그들과 연결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인생은 이렇게 신비스럽게 엮어지는 멋으로 살아지는게 아닌가.
지나가 버린 한 순간을 그대로 품고 있는 이 그림은 항상 내곁에 있다. 꽃잎 끝을 흰 페인트로 슬쩍 터치한 빨간색 튜울립 그림은 친구 하나 믿고 무작정 비행기를 탄 나의 시들지 않는 우정으로 항상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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