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29, 2015

맨해튼 재 상경


저렇게 많은 방 중에 내 방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늘 높이 솟은 빌딩의 창문 수는 갠지스 강의 모래 만큼이나 많고 밤이면 은하수를 끌어 당긴 듯 빌딩의 불빛이 영롱하다.
맨해튼은 나의 이상향이다. 무릉 도원이며 에덴 동산이다.
하지만 아틀랜틱 바다 속의 아틀랜티스인가 아련하기만 하다.
무작정 상경으로 뉴욕에 오자마자 원숙이와 함께 57가에서부터 5 에브뉴를 따라 월드 트레이드 쎈터까지 걸었다.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에서 립스틱을 발라 보고, 디스카운트 스토어 ODD JOB에서 1달라 짜리 스카프를 하나씩 사 두르고 챠이나 타운에 가서 피넛 소스의 국수를 먹었다.
‘이거봐  맨해튼이 고구마 같이 생겼지. 남북으로 길게 난 길은 에브뉴, 동서로 난 길은 스트릿이야.’ 거의 매일 십자수를 놓는 것 처럼 한블럭 한블럭 씩을 돌아 다녔다. 뮤지움과 갤러리,백화점과 부티크와 도매상과 꽃 시장, 핫 독 스탠드와 피자와 베이글. 화가 변종곤 씨의 팔뚝을 부여잡고 걸었던 대낮에도 음산한 할렘의 모닝 사이드 거리. 한 블럭마다 다른 한 세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상상했던 미국이 아니었다.
파슨스 스쿨 입학원서를 내러 갔을 때 뉴욕이 어떻냐는 접수원의 물음에 ‘컨퓨전.confusion’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러면 그렇지. '하듯이 웃었다. 그 당시 나의 생활은 그 혼동을 하나씩 헤쳐가는 작업이었다. 메디슨 에브뉴가 명동거리처럼 내 눈에 익어 갈 무렵 맨해튼을 떠났다.
그 때는 몰랐다. 내가 맨해튼을 좋아한 줄을.  
답답했던 한국에서부터 확 놓여난 자유함을 누렸던 때문일까. 아니면 한껏 누려보지도 못하고 더 답답한 세상으로 들어 간 못 다한 아쉬움인가.시간이 갈 수록 이스트 사이드 웨스트 사이드 업타운 다운타운 구석구석에 향수가 쌓이기 시작했다. 
30년이 지난 요즈음도 맨해튼을 갈 때마다 항상 짝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지만 그는 나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랜드센트럴 역에서 거리로 나서자 마자 눈 앞을 가로막는 빌딩 아래 자동차로 꽉 메워진 거리와 프렛쯜 굽는 냄새 속으로 왠지 좀 외롭게 들어 선다. 내가 한 없이 작아진다. 누구도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바로 그 무관심인가 보다. 내가 맨해튼을 좋아하는 이유가.
나를 내버려 둬 주는 친절한 무관심이다. 여기서는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고 그 눈치를 내가 알아채야 하는 일도 없다. 내가 오로지 나 일수가 있는 자유를 맛보는 것이다.
미국 속의 한국인도 아니고, 딸도 엄마도 언니도 와이프도 며누리도 아닌 나, 선생님도 집사님도 아닌 나.
젊은이들이 제각각의 방향으로 흩어져 가는 한 이스트 빌리지에라도 가면, ' 새로 시작할 수 만 있다면......'잠자고 있던 에너지가 솟는다. 마음의 늪을 떠나 온 철새의 둥지 같은 '내 방이 하나 있다면.'  빌딩의 숲을 바라본다.
언젠가는 저 곳으로 재 상경하리라.

Saturday, May 23, 2015

자화상

자화상


수필은 자화상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자기가 그린 자화상이다. 
내가 쓴 글자 하나하나에서 내 얼굴을 피할 수 없다. 어느 날 사진을 보고 ‘이게 나란 말인가?’ 깜짝 놀라듯이 내가 쓴 글이 낯 설기만 할 때가 있다. 엉뚱한 말이 쓰여있고 어설프기만 하다. 그러나 구구 절절 내 모습이 서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당에 돋은 잡풀에서부터 우주 끝까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나의 모양을 담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고 시를 읽으며 시를 쓴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기가 쉽지 않지만 수필을 읽으면 금방 수필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 어디 사는지 몇 살인지 뭘 하는지 금방 알수 있다.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 인생철학은 어떠한지 글 쓴 사람의 사생활을 훤하게 알게 된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자기가 다 털어놓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필은 자기 얼굴이다. 화가 난  할아버지 같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서부터 귀에 붕대를 감은 고호, 심장에서 피가 흐르는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처럼 자화상이라고 불리우는 그림 속 얼굴들은 하나도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이상한 표정들이다.
화가들은 남의 초상화는 아름답게 그렸어도 자기 얼굴은 있는 그대로 그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린다.
왜 그렇게 많은 화가들이 자기 얼굴을 그릴까? 모델이 없어서는 아니다. 고호는 2000개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나르시스의 후예들이기 때문일까. 아니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기를 몰라 봤다. 화가들은 자기 얼굴을 안다. 잘 알면서도 자기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 과연 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어떤 모습을 한 인간일까......
어쩌면 자기를 그리면서 자신에게 대한 불만을, 때로는 그런 자신에게 대한 연민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갈팡질팡 하는 삶 속에서 진짜 자기를 찾고 싶은 것일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이유는 나 없이는 세상 또한 없기 때문이다. 
15세기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자화상에다 ‘1433년 10월 21일, 얀 반 에이크가 나를 제작했다.’고 사인대신 적어 놓았다. 
그렇다. 수필도 나를 제작해 내는 일이다.
하얗게 빈 공간을 내가 살고 있는 공간으로 채우기 위해 자판기를 두드린다. 흔들리는 나무잎 같은 생각과 출렁이는 물결 같은 마음을 손가락에 묻혀 써내려간다. 글자로 채워지는 화면 위로 위로 어른대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윤동주 씨의 자화상 속 ‘한 사나이’ 대신 한 여자를 넣어 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여자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여자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여자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여자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여자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여자가 있습니다.

수필을 쓰면서 자꾸만 한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가 지겨워져서 외면해보지만 그래도 안타까와 어쩔수 없이 다시 돌이켜 그 여자를 찾는다. 수필은 보기 싫은 모습까지 그려내는 나의 자화상이다.

2011년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문인극 대본/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등장인물 :   앙드레 지드, 나레이터, 시인 1, 2, 3, 4, 5, 6 …가수, 무용수 장면 :   거리의 카페 …테이블, 의자, 가로등… 정원 ….꽃, 화분, 벤치  숲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