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23, 2015

자화상

자화상


수필은 자화상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자기가 그린 자화상이다. 
내가 쓴 글자 하나하나에서 내 얼굴을 피할 수 없다. 어느 날 사진을 보고 ‘이게 나란 말인가?’ 깜짝 놀라듯이 내가 쓴 글이 낯 설기만 할 때가 있다. 엉뚱한 말이 쓰여있고 어설프기만 하다. 그러나 구구 절절 내 모습이 서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당에 돋은 잡풀에서부터 우주 끝까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나의 모양을 담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고 시를 읽으며 시를 쓴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기가 쉽지 않지만 수필을 읽으면 금방 수필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 어디 사는지 몇 살인지 뭘 하는지 금방 알수 있다.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 인생철학은 어떠한지 글 쓴 사람의 사생활을 훤하게 알게 된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자기가 다 털어놓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필은 자기 얼굴이다. 화가 난  할아버지 같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서부터 귀에 붕대를 감은 고호, 심장에서 피가 흐르는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처럼 자화상이라고 불리우는 그림 속 얼굴들은 하나도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이상한 표정들이다.
화가들은 남의 초상화는 아름답게 그렸어도 자기 얼굴은 있는 그대로 그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린다.
왜 그렇게 많은 화가들이 자기 얼굴을 그릴까? 모델이 없어서는 아니다. 고호는 2000개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나르시스의 후예들이기 때문일까. 아니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기를 몰라 봤다. 화가들은 자기 얼굴을 안다. 잘 알면서도 자기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 과연 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어떤 모습을 한 인간일까......
어쩌면 자기를 그리면서 자신에게 대한 불만을, 때로는 그런 자신에게 대한 연민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갈팡질팡 하는 삶 속에서 진짜 자기를 찾고 싶은 것일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이유는 나 없이는 세상 또한 없기 때문이다. 
15세기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자화상에다 ‘1433년 10월 21일, 얀 반 에이크가 나를 제작했다.’고 사인대신 적어 놓았다. 
그렇다. 수필도 나를 제작해 내는 일이다.
하얗게 빈 공간을 내가 살고 있는 공간으로 채우기 위해 자판기를 두드린다. 흔들리는 나무잎 같은 생각과 출렁이는 물결 같은 마음을 손가락에 묻혀 써내려간다. 글자로 채워지는 화면 위로 위로 어른대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윤동주 씨의 자화상 속 ‘한 사나이’ 대신 한 여자를 넣어 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여자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여자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여자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여자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여자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여자가 있습니다.

수필을 쓰면서 자꾸만 한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가 지겨워져서 외면해보지만 그래도 안타까와 어쩔수 없이 다시 돌이켜 그 여자를 찾는다. 수필은 보기 싫은 모습까지 그려내는 나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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