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수필은 자화상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자기가 그린 자화상이다.
내가 쓴 글자 하나하나에서 내 얼굴을 피할 수 없다. 어느 날 사진을 보고 ‘이게 나란 말인가?’ 깜짝 놀라듯이 내가 쓴 글이 낯 설기만 할 때가 있다. 엉뚱한 말이 쓰여있고 어설프기만 하다. 그러나 구구 절절 내 모습이 서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쓴 글자 하나하나에서 내 얼굴을 피할 수 없다. 어느 날 사진을 보고 ‘이게 나란 말인가?’ 깜짝 놀라듯이 내가 쓴 글이 낯 설기만 할 때가 있다. 엉뚱한 말이 쓰여있고 어설프기만 하다. 그러나 구구 절절 내 모습이 서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당에 돋은 잡풀에서부터 우주 끝까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나의 모양을 담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고 시를 읽으며 시를 쓴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기가 쉽지 않지만 수필을 읽으면 금방 수필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 어디 사는지 몇 살인지 뭘 하는지 금방 알수 있다.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 인생철학은 어떠한지 글 쓴 사람의 사생활을 훤하게 알게 된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자기가 다 털어놓기 때문이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자기가 다 털어놓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필은 자기 얼굴이다. 화가 난 할아버지 같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서부터 귀에 붕대를 감은 고호, 심장에서 피가 흐르는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처럼 자화상이라고 불리우는 그림 속 얼굴들은 하나도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이상한 표정들이다.
화가들은 남의 초상화는 아름답게 그렸어도 자기 얼굴은 있는 그대로 그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린다.
화가들은 남의 초상화는 아름답게 그렸어도 자기 얼굴은 있는 그대로 그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린다.
왜 그렇게 많은 화가들이 자기 얼굴을 그릴까? 모델이 없어서는 아니다. 고호는 2000개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나르시스의 후예들이기 때문일까. 아니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기를 몰라 봤다. 화가들은 자기 얼굴을 안다. 잘 알면서도 자기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 과연 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어떤 모습을 한 인간일까......
어쩌면 자기를 그리면서 자신에게 대한 불만을, 때로는 그런 자신에게 대한 연민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갈팡질팡 하는 삶 속에서 진짜 자기를 찾고 싶은 것일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이유는 나 없이는 세상 또한 없기 때문이다.
15세기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자화상에다 ‘1433년 10월 21일, 얀 반 에이크가 나를 제작했다.’고 사인대신 적어 놓았다.
그렇다. 수필도 나를 제작해 내는 일이다.
하얗게 빈 공간을 내가 살고 있는 공간으로 채우기 위해 자판기를 두드린다. 흔들리는 나무잎 같은 생각과 출렁이는 물결 같은 마음을 손가락에 묻혀 써내려간다. 글자로 채워지는 화면 위로 위로 어른대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15세기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자화상에다 ‘1433년 10월 21일, 얀 반 에이크가 나를 제작했다.’고 사인대신 적어 놓았다.
그렇다. 수필도 나를 제작해 내는 일이다.
윤동주 씨의 자화상 속 ‘한 사나이’ 대신 한 여자를 넣어 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여자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여자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여자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여자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여자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여자가 있습니다.
수필을 쓰면서 자꾸만 한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가 지겨워져서 외면해보지만 그래도 안타까와 어쩔수 없이 다시 돌이켜 그 여자를 찾는다. 수필은 보기 싫은 모습까지 그려내는 나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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