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27, 2015

그랜드 센트럴 대합실에서 달리기

그랜드 센트럴 대합실에서 달리기


개찰구 18번은 ‘마이클 죠단 그릴’에서부터 대합실을 가로 질러 간 끝에 있다.
몇 시 차냐고 물어 보는 딸에게 나는 자신있게, ‘시간 많아.’ 했다. 셀 폰을 열어 보니 8시 50분이다. “ 여기 1분이 얼마나 긴지 알아?  엄마가 니네들 어릴 때, 기차 시간 몇 초를 남겨 놓고 막 뛰었었잖아.” 했다. 9시까지는 긴 시간인 것이다.


방학 때 기차를 타고 인턴을 다녔었던 아들이 1분의 귀함을 아는지, “ 아이 노우.”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가 흩어 졌다가 하는 그랜드 센트럴 대합실을 새삼스럽게 내려다 본다. 일어 서기가 싫었지만 집에 혼자 있는 남편을 생각해서 9시 기차는 꼭 타야지 했다. 지들끼리 킬킬거리는 애들을 바라보는 것 만도 즐거웠다.


‘오케이. 가자.’ 계산서를 놓으며 시계 탑을 보았다. “어머나!” 큰 바늘이 12시 가까히 가 있었다. 갑자기 딸이 벌떡 일어나 한국 말로 “뛰자!” 하더니 내 팔을 부여 잡고 층계를 뛰어 내려간다. "아이구, 희련아." 딸에 끌려가며 웃음이 터졌다. 뒤도 안 돌아보고 뛰던 딸도 소리 내어 웃는다.  25, 24, 23...개찰구 번호가 가까워지면서 내 발이 딸보다 더 빨라 졌다. 개찰구 18번이 저 앞에 나타난다. 나는 딸 애의 손을 뿌리치며 뒤도 안 돌아보고 개찰구 안으로 뛰어 든다. 운전대에 앉은 기차 운전사와 눈을 마주치며 일단 안심을 하고는 기차 문을 향해 돌진한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덜컹하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랜드 센트럴 대합실에서 뛰는 일은 나의 전문 특기였다. 
결혼 초 기차를 타고 맨해튼 32가에 있던 신문사를 다닐 때 부터이다. 동네 기차역으로 남편이 동네 기차역으로 데려다 주고 마중을 오고 했던 그 때, 거의 매일 기차 시간에 맞추어 뛰곤 했다. 나중에 다섯살 세살 두 아이를 두고 롱아일랜드 시티에 있는 신문사를 다닐 때에는  명실 공히 '뛰는 인생'을 살았다. 신문사를 나와 전철 하나를 놏치면 그랜드 센트럴에서 기차를 하나 놏치는 것이고, 그러면 아이들이 학교 마당에서 울고 서 있는 것이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개찰구로 뛰어 드는 순간에 눈 앞에  미끄러지듯 떠나가는 기차를 바라보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아이를 봐 주시러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교대로 와 계셨지만 뛰는 인생은 계속되었다.  기차 역에서 셔틀 버스를 타고 집 앞에 내리면 어둑 할 때까지 마당에서 놀다가 버스 소리에 골목 길을 달려와 매달리는 아이들도 물론 이지만 하루 종일 집안 일하시고 저녁 식사까지 준비하시는 어머니 때문에 어떻게 해서 든지 기차를 놏치지 않으려고 분초를 다투었다.


직장을 그만 둔 후에도 맨해튼을 갈 때마다 나의 교통 수단은 메트로 노스 기차다. 한 친구는 뉴욕에 올 때 마다 나 편하라고  그랜드 센트럴 바로 옆 하이야트 호텔에 묵곤 했다.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기차시간 직전에야 호텔을 나와서는 역시 또 그 넓은 대합실을 뛰기도 했다.
그랜드 센트럴도 세월 따라 변했다. 홈레스가 누워있던 자리엔 고급 가게들이 들어섰고, 길게 줄지어 서있던 공중전화도 사라졌다.  나도 변했다. 애들에게 사다 주던 빵집 ‘자이로스 Zairo's는 그대로 있지만 빵을 사들고 갈 일도 없어졌고, 남편이 기차 역에서 기다릴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기차 도착 10분 전에 셀폰으로 남편에게 전화하면 되고 만일 기차를 놏치면 한 30분 슬슬 가게들을 구경하던지 매점에서 잡지를 보면 된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기차를 타는 일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날은 소포로 보내도 될 작은 물건을 딸에게 전해 준다는 핑계로 기차를 탔다. 오랜 만에 얼굴을 보여주는 효도를 하려고 아들도 합세를 했다. 기차역 가까운 곳에서 저녁을 먹고 엄마를 배웅한다고 역으로 함께 들어 온 아이들과 와인을 마시며 평화스러웠던 것도 잠시, 다시 그 대합실을 요란하게 뛰었던 것이다. 딸과 함께.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데 셀폰이 울린다. ‘엄마, 인준이가 우리 뛰는 모양이 너무 우습더래.’ 아직도 웃음이 섞인 딸의 목소리다. ‘그래. 나도 웃으워서 혼났네. 근데, 재밌었다. 그치?.’ 말은 그렇게 나오는데, 혼자서 치열하게 뛰던 그랜드 센트럴을 딸에게 끌려 휘청거리며 뛰고 난 감격인가 아니면 흘러간 젊음에 대한 노스탈지아인가. 나의 웃음은 어느 새 소리 없는 눈물로 바뀌고 있었다.

Thursday, March 26, 2015

흰 테두리의 빨간 튜울립

흰 테두리의 빨간 튜울립


나를 뉴욕에 도착한 첫날 밤으로 되돌려 준 것은 황규백 씨의 튜울립 판화이다. 손바닥 보다 조금 큰 그림 속에 그려진 한 송이 튜울립은 꽃 잎 가장자리에 하얀 테가 둘러 있다. 미국에 오자마자 본 바로 그 튜울립 꽃이다. 꽃 잎의 끄트머를 흰 페인트의 붓이 살짝 터치하고 지나간 듯한 빨간 색 튜울립!

지방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고속버스 타는 일에 싫증이 날 무렵 미국에 한번 가 볼까 마음 먹었다. 친구 원숙이가 미국에 오라 오라 했어도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유학을 하고 오면 혹시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갈 수있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비행기 타야 가나보다 하던 시절에 더구나 노처녀에게는 안 나온다는 비자를 운 좋게도 즉석에서 받았고, 홀트 아동기관으로 비행기 표도 반 값으로 쉽게 비행기를 탔다.
말이 잘 안 통하는 캐나다인 신부와 나는 역시 말이 안 통하는 입양아 세 명을 맡았다. 신부님이 남자 아이를 맡겠다고 해서 왕왕 우는 서 너 살짜리 여자애와 갓난 애기는 내 차지가 되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뒷 자석에서 잠시도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여자 애를 멕여주고 달래서 재워주고 그리고 찡찡거리는 애기 기저기 갈고 젖병 물려 주는 일을 했다. 승객들이 우리를 보고 ‘쯔쯔’하는 것이 꼭 나에게 하는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 애들 봐주는 일에 쩔쩔맷다.
케네디 공항에서 아이들을 미국 사람에게 넘겨 줄 때에는 속이 다 시원했다. 제일 늦게 나오는 나를 손을 흔들며 맞이 하는 원숙이를 보고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차 속에서 원숙이가  ‘ 저기가 맨해튼이야’, '저기가 양키 스테디움이야.’하면 멍하니 바라 보기만 했다. 하이웨이를 달리고 다리를 건너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고도 한참 만에 친구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머리 속은 백지였다.  
그런데 정신이 바짝 들었다. 차가운 2월의 밤 공기 때문이 아니다. 누런 가로등 불 빛에 어렴풋이 비치는 시커먼 건물 하나가 원숙이의 집이다.  거리는 마치 전쟁을 치룬 듯 했다. 묵직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 서는데 집안은 폐허 그 자체였다.  
화가의 꿈을 안고  미국에 유학 온 원숙이가 100년 된 낡은 집을 사서 남편이랑 직접 고치고 있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 잘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상상을 초월한 광경이었다.  ‘여기가 미국이란 말인가.’
우리는 삐꾹거리는 층계를 올라가고 또 올라가 어느 방 앞에 멈추었다. 편지에 ‘네 방을 만들어 놨어’했던 그 방인줄 짐작할 겨를도 없이 원숙이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향내가 풍기는 환한 방이 요술처럼 나타났다.
높은 천정에서 부터 길게 내려 뜨려진 우유빛 레이스 커텐과 그 앞에 놓인 한 송이 빨간 튜울립이 눈에 확 들어 왔다. 꽃 잎에 하얀색 테두리가 둘려 진 생전 처음 보는 튜울립이었다. 그제사 내가 딴 나라에 왔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벽에는 연 보라빛 은행 잎이 흩날리듯 그려져 있었고, 침대에는 옅은 주황색과 옅은 밤색이 체크 무늬 이불보가 덮혀있다.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보던 방이다.황홀했다.
문을 막아 놓은 판자를 뜯어 내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치우면서 우선 전기 공사부터 했다는 그 혼란 통 속에서, 원숙이는 벽에다 은행 잎을 그리고 백화점에서 주는 향수 쌤플 종이를 꽂으며 내가 이 방에 들어서는 그 순간을 기대한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밀크 박스를 겹쳐 만든 침대에 누어 곧장 잠이 들었다.


쏜 살 같은 시간을 쫓아 살던 어느 날, 선물 받은 그림의 포장을 뜯다가 깜짝 놀랐다. 흰 테두리의 빨간 튜울립!  아니 그 꽃 아닌가. 그림 속 창가에 놓인 튜울립 한 송이! 파김치가 된 나에게 낯 선 나라를 일깨워 준 꽃. 뉴욕에 도착한 날 방문을 열었을 때 요정처럼 나를 맞이 하던 하얀 테두리의 튤울립과 이렇게 재회를 한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이 튜울립을 여러번 봤을 테지만, 그 날하고 연결이 되지는 않았었다. 황규백 화백이 선택한 꽃과 그림을 그리는 내 친구가 나를 위해 선택한 꽃이 똑 같다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두 사람의 예술적 영감에 내가 끌려 들어간 것일까.
깜깜한 밤에 불쑥 튀어 나온 듯한 꿈 같이 아름다운 방의 감격을 그대로 담고있는 이 그림은 늘 내 곁에 있다. 그림속 흰테두리 튜울립을 볼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방의 그 튜울립은 금방 시들어 없어 졌지만, 친구 하나 믿고 무작정 비행기를 탔던 그 때의 내 마음은 시들지 않고 있다. 그림의 꽃이 시들지 않듯이 말이다.

내고향 142가

내 고향  142가


517 West 142nd St. NY, NY 10031.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미국 주소다.
한국으로 편지를 썼다. ‘내가 사는 집 바로 앞이 브로드웨이고 거기서 쭉 걸어가면 허드슨 강이 나와.’ 누구라도 브로드웨이 하면 네온 싸인이 휘황찬란한 뮤지컬을 떠 올릴 것이고, 허드슨 강이란 말에서는 빠리의 세느강 처럼 예술적 분위기를 연상해주리라. 실제로 그 집은 브로드웨이와 142가 선상에 있고  브로드웨이를 건너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허드슨 강이 흐르고 있다.  
거의 매일 한국으로 써 보낸 편지마다 브로드웨이나 허드슨 강 말로도 ‘맨하튼 거리에는 밍크 코트를 입은 남자들이 활보를 한단다.’ ‘거리 모퉁이에는 쥴리아드 학생들이 서서 바이얼린을 켜고 노래도 부르고 그런단다.’ 식으로 뉴욕을 묘사했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실이긴 했지만 현실에서는 그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내 가족과 친구들이 ‘과연 노려가 그 근사한 뉴욕엘 갔구나.’ 부러워 해 주기를 바랬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의 집은 화려한 브로드웨이 42가에서 꼭 100블럭을 북쪽으로 올라 온 곳인데 완전히 딴 세상이다. 이름하여 스패니쉬 할렘이다. 여기서 한 블럭 뒤의 암스테르담 에브뉴는 대 낮에도 음산했다.
142가 근처의 브로드웨이는 원색의 물건들이 꽉찬 잡화상과 UNI SEX라고 쓰인 미장원, 생선 가게, 술 가게들이 줄 지어 있다. 버스나 서브웨이를 타러 가는 이 길에는 누런 봉지에 든 맥주를 마시고 있는 흑인 아저씨들, 귀걸이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흑인 아줌마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치킨 튀기는 냄새와 남미의 음악소리와 뒤 섞인다.
이 동네가 나와 뉴욕과의 첫 대면이며 거대한 나라 미국과의 첫 만남이었다.
친구 원숙이는 자기 집에는 방이 많으니까 걱정말고 오라고 했다. 친구의 말대로 브라운 스톤 빌딩 층층마다 방은 참 많았지만, 방 다운 방은 없었다. 지하실부터 옥상까지가 공사 중이었다.
층 마다의 대리석 화장실이 있고 음식이 오르내리던 도르레식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고 하인과 마부들이 드나들던 뒷 문 밖으로 말이 들어올 수 있는 마당이 있는 브라운 스톤 건물의 전성시대가 능히 상상이 된다. 클로젯에서는 100년된 신문 조각도 나왔다. 원숙이는  횟가루 범벅이 되어 벽과 바닥과 천정을 뜯으며 5층짜리 맨션의 구석구석을 자기 것의로 만들어 나갔다.
이 집에는 나 말고도 한국서 유학온 신학생과 세탁소 다니던 그의 아내, 전시하러 왔다가 뉴욕에 반해 주저 앉은 화가 변종곤 씨가 있었고 가끔씩 집 나온 고등학생이 와서 살기도 했다. 그 당시 뉴욕에 살던 화가, 무용가 연극인들도 자주 드나 들었다.
내가 다니던 ‘아트 스튜던트 리그 어브 뉴욕’ 앞 카네기 홀이 있는 57가 거리에는 정말로 밍크 코트 입는 남자가 걸어다니고 악기를 맨 음악도와 화구를 든 미술학도들이 많았다. 우물 안에 있던 내가 센트럴 파크에가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에 어리둥절 하던 때다. 뉴욕과 아트와 젊음이 뒤 섞인 그 곳에서의 매일 매일은 어제와 전혀 다른 예상 못한 오늘이 되곤 했다. 바로 그런 식으로 결혼을 했고 142가 517번지 에 풀어 놨던 이민가방을 다시 싸들고, 8개월 만에 내가 살던 집을 떠났다.
지금은 그 곳에서 허드슨 강을 따라 곧장 또 100 블럭 정도 북쪽에 있는 한적한 동네 웨체스터에 산지 30년이 넘었다.
맨 처음 살던 4층 화장실을 개조한 내 방에서 얼마 후에 옮겨 간 1층 넓은 리빙 룸 한쪽을 막은 문간 방, 손님들이 오면 친구랑 같이 커다란 냄비에 음식을 만들었던 지하실 부엌이 생생하다. 어둑할 때에는 138가에서 버스를 내려 전화를 하면 신학생 아저씨가 개를 끌고 나를 데리러 오던 으시시하던 스페니쉬 할렘이 마치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서울처럼 그립다. 
언덕 넘어 혜화 국민학교를 다니던 명륜동,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걷던 경복궁 옆 동네 신교동, 어두운 밤 개천 건너 귀가하던 대학시절의 정능 집 처럼 142가 517번지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의 고향이 되었다.

Monday, March 23, 2015

초원의 빛이여

                               워즈워드를 찾아 가는 길

못 보면 말지겉에서 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5시에 문을 닿는다는 걸 알면서도 무조건 차를 달렸다고 보김 씨가 후에 말했다잘하면  아슬 아슬하게라도 도착 할 수 있었기 때문었단다
산 등성을 병풍처럼 두르고 끝 없이 이어지는 호수를 따라 도로를 달릴 때에는 어느 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앞자리 성희 씨도 말이 없다.
윌리암 워즈워드 하우스를 향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떠난 길에서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글라스고우에서 레이크 디스트릭트로 가는 하이웨이 양 쪽 어디에나 양들의 모습이 보인다. 양모가 유명할 수 밖에 없구나.  Lamb요리가 흔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양떼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려고 애쓰다가 말했다. ‘차를 잠깐만 멈추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 텐데.’ 그러자 보김 씨는 하이웨이 옆에 난 작은 오솔길로 차를 90도 돌려 들어 선다아무 곳에서나 멈출 수 있는 자동차 여행의 맛이 이것이구나 
양 쪽으로 돌담이 둘러친 좁다란 길에는 두 줄기로 차가 지나간 자리가 나 있다. 풀 밭에 머리를 숚이고 있던 양 몇 마리가 우리를 향해 모여 든다작은 솜 뭉치가 흩어져 있는 것 처럼 보이던 양의 얼굴에 ‘놀라움의 표정이 역역하다. 우리는 신이 났다.
울툴불퉁 흙 길을 몇 미터쯤 들어 갔을까바라만 보던 스카트랜드 초원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다. 둘러봐도 사방천지에 아무런 인적도 없었다. 차에서 내리니 구름 그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풍경화 속으로 파 묻혔다. 광활한 하늘에서는 구름사이로 햇빛이 내리는 그야말로 원시의 정기가 가득한 대자연이다.  짙푸른 대지 위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두 손을 벌리고  야아 소리도 질러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가야지.' 차에 올랐다얼굴에서 웃음이 가라 앉기 전이었다. 부르릉~ 차 바퀴가 헛돈다.차를 뒤로 빼어 다시 좁 다란 길 목까지 오자 바퀴가 더 깊숙히 진흙에 빠졌다
두 사람은 차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내렸다. 차가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아 달려 오는 힘으로 진흙을 넘어 보려다가 또 빠져 버린다. 질퍽한 땅 위에 돌맹이를 날라다 깔았다그래도 안됀다. 차의 방향을 바꾸어도 바퀴는 진흙을 튀기며 헛 돌기만 한다
몇번 더 시도해보고 안돼면 경찰을 부르자. 남의 초원에 차를 몰고 들어 온 벌을 받아야 겠지. 토잉 카가 좁은 오솔 길을 들어올 수 없을텐데. 차는 두고 우리만 싣고 갈 것인가
차 바퀴가 빠지는 자리에 마구 돌맹이를 던져 놓으면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써본다. 운전대를 잡은 보김 씨의 편안한 얼굴에서 일말의 희망도 붙잡는다.


 차를 초원 가운데로 멀리 몰고 갔다가 크게 돌아 속력을 내며 오솔길 앞까지와 서 멈춘다. 보김 씨가 말한다. ‘앞 바퀴 앞에다 돌맹이를 더 놓으세요.’ 부랴부랴 돌맹이들을 던져 놓았다. 이번엔 차를 조금 뒤로 뺏다가 급히 돌진해 오자 바퀴가 덜컹하고 돌맹이 위로 올라 섰다.  차는 멈추지 않고 오솔길로 전진을 하고 우리는  환성을 지르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짐을 들고 차를 쫓아 갔다.  양쪽 돌담에 스치지 않도록 차가 살살 빠져 나와 하이웨이로 들어서고 나서야 동시에 세상에!’를 외쳤다. 그리고는 모두 한바탕 웃었다.

천천히 가요. 윌리암 워즈워드 안 봐도 되요. 우리가 살아 난 것만 해도......
중학교 때 노트 북에다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적어 놓고 그 옆에예쁜그림을 그려 놓았었다. 시를 음미하기 보다는 시와 어울리는 찻잔이나 꽃 가로등 같은 그림을 그리던 재미였으리라. 그 때 분명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에도그림을 그렸을테지만 시 자체를 제대로 감상해 본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어둑해지는 호숫가 산골 마을에는 비까지 뿌린다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창문에 불빛 비치는 자그마한 건물로 뛰어 들었다. ‘쏘리. 위 클로즈드 파이브 미니츠 어고.’ 당연히 들을 말이었다젊은 남자 직원은 세명의 아시안 여자들에게서 절망의 빛을 보고는 뒷방 메니저에게 물어 보겠다고 한다. ‘오케이 20분 만입니다. 이 표는 내일 와서 또 써도 됩니다.’ 신사적이다
우리는 서둘러 바로 옆 오막살이 같은 집으로 갔다. 위대한 시인의 흔적을 20분 안에 소화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됀다
입구에 안내원이 지키고 서 있는 가운데 어둠침침한 집 안을 둘러 보고 왠지 허탈하게 나서는데, 웬 퉁퉁한 여자가 테이블 위에 촛불을 키고 있었다. 방 안에는 의자 몇 개가 둥그렇게 놓여져 있었다. 저녁 6시부터 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워즈워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했다. 한 달에 한번 씩 있는 모임이란다.  
200년전 그 때 시인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시인의 시를 낭송하는 사람들. 전혀 뜯어 고치고 바꾸고 없애고 덫 붙이지 않은 채로 시인의 삶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바로 이것이 워즈워드의 흔적이었다
어둠이 깔리면서 더욱 적막해 지는 돌 길을 걸었다. 광활한 풀 밭에서 난감했던 순간도 양들의 놀란 얼굴도 오로지 찬란한 초원의 빛으로 남는다. 워즈워드가 글을 쓰던 곳에 살짝 들려본 것 만으로도  내 마음 속에 촉불이 켜진 듯 얼굴에 닿는 차가운 비가 싫지 않았다. 고색의 돌 집들 너머로는 산이 가까히 서있다. 저 산 아래 길 따라 호수가 있는 것을 안다. 
다시 가볼 수는 없을 지라도 시인을 찾아가던  그 길은 길게길게 남을 것이다.




무소부재 GPS여행




세상과 인간이 얽히는 정서의 결핍이다. 1주일 내내 쌩쌩거리며 운전을 한 보김 씨도 사실 이렇게 GPS만 매달려 가다 보면 우리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며 때때로 지도를 펼쳐 보곤 했다.

버밍햄을 떠나 요크, 스카보로우 에딘버러, 글라스고우 또 레이크 디스트릭의 호수를 따라가는 산길과  리버풀  어느 낯 선 골목 길도 아무 걱정이 없다 폴 매카트니가 살던 집 주소를 입력하자 퇴근시간으로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그야말로 매일 다니던 길을 가듯이 운전해 갔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동네로 요리저리 접어들어 가서는 한 블럭 전체에 나라비 선 연립주택 중 한 집앞에서 GPS는 당연하다는 듯이 '유어 데시트네이션 이즈 언더 래프트(Your Sedtination is on the left)'라고 알려준다.



2011년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문인극 대본/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등장인물 :   앙드레 지드, 나레이터, 시인 1, 2, 3, 4, 5, 6 …가수, 무용수 장면 :   거리의 카페 …테이블, 의자, 가로등… 정원 ….꽃, 화분, 벤치  숲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