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센트럴 대합실에서 달리기
개찰구 18번은 ‘마이클 죠단 그릴’에서부터 대합실을 가로 질러 간 끝에 있다.
몇 시 차냐고 물어 보는 딸에게 나는 자신있게, ‘시간 많아.’ 했다. 셀 폰을 열어 보니 8시 50분이다. “ 여기 1분이 얼마나 긴지 알아? 엄마가 니네들 어릴 때, 기차 시간 몇 초를 남겨 놓고 막 뛰었었잖아.” 했다. 9시까지는 긴 시간인 것이다.
방학 때 기차를 타고 인턴을 다녔었던 아들이 1분의 귀함을 아는지, “ 아이 노우.”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가 흩어 졌다가 하는 그랜드 센트럴 대합실을 새삼스럽게 내려다 본다. 일어 서기가 싫었지만 집에 혼자 있는 남편을 생각해서 9시 기차는 꼭 타야지 했다. 지들끼리 킬킬거리는 애들을 바라보는 것 만도 즐거웠다.
‘오케이. 가자.’ 계산서를 놓으며 시계 탑을 보았다. “어머나!” 큰 바늘이 12시 가까히 가 있었다. 갑자기 딸이 벌떡 일어나 한국 말로 “뛰자!” 하더니 내 팔을 부여 잡고 층계를 뛰어 내려간다. "아이구, 희련아." 딸에 끌려가며 웃음이 터졌다. 뒤도 안 돌아보고 뛰던 딸도 소리 내어 웃는다. 25, 24, 23...개찰구 번호가 가까워지면서 내 발이 딸보다 더 빨라 졌다. 개찰구 18번이 저 앞에 나타난다. 나는 딸 애의 손을 뿌리치며 뒤도 안 돌아보고 개찰구 안으로 뛰어 든다. 운전대에 앉은 기차 운전사와 눈을 마주치며 일단 안심을 하고는 기차 문을 향해 돌진한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덜컹하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랜드 센트럴 대합실에서 뛰는 일은 나의 전문 특기였다.
결혼 초 기차를 타고 맨해튼 32가에 있던 신문사를 다닐 때 부터이다. 동네 기차역으로 남편이 동네 기차역으로 데려다 주고 마중을 오고 했던 그 때, 거의 매일 기차 시간에 맞추어 뛰곤 했다. 나중에 다섯살 세살 두 아이를 두고 롱아일랜드 시티에 있는 신문사를 다닐 때에는 명실 공히 '뛰는 인생'을 살았다. 신문사를 나와 전철 하나를 놏치면 그랜드 센트럴에서 기차를 하나 놏치는 것이고, 그러면 아이들이 학교 마당에서 울고 서 있는 것이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개찰구로 뛰어 드는 순간에 눈 앞에 미끄러지듯 떠나가는 기차를 바라보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결혼 초 기차를 타고 맨해튼 32가에 있던 신문사를 다닐 때 부터이다. 동네 기차역으로 남편이 동네 기차역으로 데려다 주고 마중을 오고 했던 그 때, 거의 매일 기차 시간에 맞추어 뛰곤 했다. 나중에 다섯살 세살 두 아이를 두고 롱아일랜드 시티에 있는 신문사를 다닐 때에는 명실 공히 '뛰는 인생'을 살았다. 신문사를 나와 전철 하나를 놏치면 그랜드 센트럴에서 기차를 하나 놏치는 것이고, 그러면 아이들이 학교 마당에서 울고 서 있는 것이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개찰구로 뛰어 드는 순간에 눈 앞에 미끄러지듯 떠나가는 기차를 바라보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아이를 봐 주시러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교대로 와 계셨지만 뛰는 인생은 계속되었다. 기차 역에서 셔틀 버스를 타고 집 앞에 내리면 어둑 할 때까지 마당에서 놀다가 버스 소리에 골목 길을 달려와 매달리는 아이들도 물론 이지만 하루 종일 집안 일하시고 저녁 식사까지 준비하시는 어머니 때문에 어떻게 해서 든지 기차를 놏치지 않으려고 분초를 다투었다.
직장을 그만 둔 후에도 맨해튼을 갈 때마다 나의 교통 수단은 메트로 노스 기차다. 한 친구는 뉴욕에 올 때 마다 나 편하라고 그랜드 센트럴 바로 옆 하이야트 호텔에 묵곤 했다.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기차시간 직전에야 호텔을 나와서는 역시 또 그 넓은 대합실을 뛰기도 했다.
그랜드 센트럴도 세월 따라 변했다. 홈레스가 누워있던 자리엔 고급 가게들이 들어섰고, 길게 줄지어 서있던 공중전화도 사라졌다. 나도 변했다. 애들에게 사다 주던 빵집 ‘자이로스 Zairo's는 그대로 있지만 빵을 사들고 갈 일도 없어졌고, 남편이 기차 역에서 기다릴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기차 도착 10분 전에 셀폰으로 남편에게 전화하면 되고 만일 기차를 놏치면 한 30분 슬슬 가게들을 구경하던지 매점에서 잡지를 보면 된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기차를 타는 일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날은 소포로 보내도 될 작은 물건을 딸에게 전해 준다는 핑계로 기차를 탔다. 오랜 만에 얼굴을 보여주는 효도를 하려고 아들도 합세를 했다. 기차역 가까운 곳에서 저녁을 먹고 엄마를 배웅한다고 역으로 함께 들어 온 아이들과 와인을 마시며 평화스러웠던 것도 잠시, 다시 그 대합실을 요란하게 뛰었던 것이다. 딸과 함께.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데 셀폰이 울린다. ‘엄마, 인준이가 우리 뛰는 모양이 너무 우습더래.’ 아직도 웃음이 섞인 딸의 목소리다. ‘그래. 나도 웃으워서 혼났네. 근데, 재밌었다. 그치?.’ 말은 그렇게 나오는데, 혼자서 치열하게 뛰던 그랜드 센트럴을 딸에게 끌려 휘청거리며 뛰고 난 감격인가 아니면 흘러간 젊음에 대한 노스탈지아인가. 나의 웃음은 어느 새 소리 없는 눈물로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