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23, 2015

초원의 빛이여

                               워즈워드를 찾아 가는 길

못 보면 말지겉에서 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5시에 문을 닿는다는 걸 알면서도 무조건 차를 달렸다고 보김 씨가 후에 말했다잘하면  아슬 아슬하게라도 도착 할 수 있었기 때문었단다
산 등성을 병풍처럼 두르고 끝 없이 이어지는 호수를 따라 도로를 달릴 때에는 어느 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앞자리 성희 씨도 말이 없다.
윌리암 워즈워드 하우스를 향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떠난 길에서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글라스고우에서 레이크 디스트릭트로 가는 하이웨이 양 쪽 어디에나 양들의 모습이 보인다. 양모가 유명할 수 밖에 없구나.  Lamb요리가 흔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양떼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려고 애쓰다가 말했다. ‘차를 잠깐만 멈추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 텐데.’ 그러자 보김 씨는 하이웨이 옆에 난 작은 오솔길로 차를 90도 돌려 들어 선다아무 곳에서나 멈출 수 있는 자동차 여행의 맛이 이것이구나 
양 쪽으로 돌담이 둘러친 좁다란 길에는 두 줄기로 차가 지나간 자리가 나 있다. 풀 밭에 머리를 숚이고 있던 양 몇 마리가 우리를 향해 모여 든다작은 솜 뭉치가 흩어져 있는 것 처럼 보이던 양의 얼굴에 ‘놀라움의 표정이 역역하다. 우리는 신이 났다.
울툴불퉁 흙 길을 몇 미터쯤 들어 갔을까바라만 보던 스카트랜드 초원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다. 둘러봐도 사방천지에 아무런 인적도 없었다. 차에서 내리니 구름 그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풍경화 속으로 파 묻혔다. 광활한 하늘에서는 구름사이로 햇빛이 내리는 그야말로 원시의 정기가 가득한 대자연이다.  짙푸른 대지 위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두 손을 벌리고  야아 소리도 질러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가야지.' 차에 올랐다얼굴에서 웃음이 가라 앉기 전이었다. 부르릉~ 차 바퀴가 헛돈다.차를 뒤로 빼어 다시 좁 다란 길 목까지 오자 바퀴가 더 깊숙히 진흙에 빠졌다
두 사람은 차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내렸다. 차가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아 달려 오는 힘으로 진흙을 넘어 보려다가 또 빠져 버린다. 질퍽한 땅 위에 돌맹이를 날라다 깔았다그래도 안됀다. 차의 방향을 바꾸어도 바퀴는 진흙을 튀기며 헛 돌기만 한다
몇번 더 시도해보고 안돼면 경찰을 부르자. 남의 초원에 차를 몰고 들어 온 벌을 받아야 겠지. 토잉 카가 좁은 오솔 길을 들어올 수 없을텐데. 차는 두고 우리만 싣고 갈 것인가
차 바퀴가 빠지는 자리에 마구 돌맹이를 던져 놓으면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써본다. 운전대를 잡은 보김 씨의 편안한 얼굴에서 일말의 희망도 붙잡는다.


 차를 초원 가운데로 멀리 몰고 갔다가 크게 돌아 속력을 내며 오솔길 앞까지와 서 멈춘다. 보김 씨가 말한다. ‘앞 바퀴 앞에다 돌맹이를 더 놓으세요.’ 부랴부랴 돌맹이들을 던져 놓았다. 이번엔 차를 조금 뒤로 뺏다가 급히 돌진해 오자 바퀴가 덜컹하고 돌맹이 위로 올라 섰다.  차는 멈추지 않고 오솔길로 전진을 하고 우리는  환성을 지르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짐을 들고 차를 쫓아 갔다.  양쪽 돌담에 스치지 않도록 차가 살살 빠져 나와 하이웨이로 들어서고 나서야 동시에 세상에!’를 외쳤다. 그리고는 모두 한바탕 웃었다.

천천히 가요. 윌리암 워즈워드 안 봐도 되요. 우리가 살아 난 것만 해도......
중학교 때 노트 북에다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적어 놓고 그 옆에예쁜그림을 그려 놓았었다. 시를 음미하기 보다는 시와 어울리는 찻잔이나 꽃 가로등 같은 그림을 그리던 재미였으리라. 그 때 분명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에도그림을 그렸을테지만 시 자체를 제대로 감상해 본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어둑해지는 호숫가 산골 마을에는 비까지 뿌린다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창문에 불빛 비치는 자그마한 건물로 뛰어 들었다. ‘쏘리. 위 클로즈드 파이브 미니츠 어고.’ 당연히 들을 말이었다젊은 남자 직원은 세명의 아시안 여자들에게서 절망의 빛을 보고는 뒷방 메니저에게 물어 보겠다고 한다. ‘오케이 20분 만입니다. 이 표는 내일 와서 또 써도 됩니다.’ 신사적이다
우리는 서둘러 바로 옆 오막살이 같은 집으로 갔다. 위대한 시인의 흔적을 20분 안에 소화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됀다
입구에 안내원이 지키고 서 있는 가운데 어둠침침한 집 안을 둘러 보고 왠지 허탈하게 나서는데, 웬 퉁퉁한 여자가 테이블 위에 촛불을 키고 있었다. 방 안에는 의자 몇 개가 둥그렇게 놓여져 있었다. 저녁 6시부터 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워즈워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했다. 한 달에 한번 씩 있는 모임이란다.  
200년전 그 때 시인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시인의 시를 낭송하는 사람들. 전혀 뜯어 고치고 바꾸고 없애고 덫 붙이지 않은 채로 시인의 삶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바로 이것이 워즈워드의 흔적이었다
어둠이 깔리면서 더욱 적막해 지는 돌 길을 걸었다. 광활한 풀 밭에서 난감했던 순간도 양들의 놀란 얼굴도 오로지 찬란한 초원의 빛으로 남는다. 워즈워드가 글을 쓰던 곳에 살짝 들려본 것 만으로도  내 마음 속에 촉불이 켜진 듯 얼굴에 닿는 차가운 비가 싫지 않았다. 고색의 돌 집들 너머로는 산이 가까히 서있다. 저 산 아래 길 따라 호수가 있는 것을 안다. 
다시 가볼 수는 없을 지라도 시인을 찾아가던  그 길은 길게길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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