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26, 2015

내고향 142가

내 고향  142가


517 West 142nd St. NY, NY 10031.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미국 주소다.
한국으로 편지를 썼다. ‘내가 사는 집 바로 앞이 브로드웨이고 거기서 쭉 걸어가면 허드슨 강이 나와.’ 누구라도 브로드웨이 하면 네온 싸인이 휘황찬란한 뮤지컬을 떠 올릴 것이고, 허드슨 강이란 말에서는 빠리의 세느강 처럼 예술적 분위기를 연상해주리라. 실제로 그 집은 브로드웨이와 142가 선상에 있고  브로드웨이를 건너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허드슨 강이 흐르고 있다.  
거의 매일 한국으로 써 보낸 편지마다 브로드웨이나 허드슨 강 말로도 ‘맨하튼 거리에는 밍크 코트를 입은 남자들이 활보를 한단다.’ ‘거리 모퉁이에는 쥴리아드 학생들이 서서 바이얼린을 켜고 노래도 부르고 그런단다.’ 식으로 뉴욕을 묘사했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실이긴 했지만 현실에서는 그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내 가족과 친구들이 ‘과연 노려가 그 근사한 뉴욕엘 갔구나.’ 부러워 해 주기를 바랬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의 집은 화려한 브로드웨이 42가에서 꼭 100블럭을 북쪽으로 올라 온 곳인데 완전히 딴 세상이다. 이름하여 스패니쉬 할렘이다. 여기서 한 블럭 뒤의 암스테르담 에브뉴는 대 낮에도 음산했다.
142가 근처의 브로드웨이는 원색의 물건들이 꽉찬 잡화상과 UNI SEX라고 쓰인 미장원, 생선 가게, 술 가게들이 줄 지어 있다. 버스나 서브웨이를 타러 가는 이 길에는 누런 봉지에 든 맥주를 마시고 있는 흑인 아저씨들, 귀걸이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흑인 아줌마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치킨 튀기는 냄새와 남미의 음악소리와 뒤 섞인다.
이 동네가 나와 뉴욕과의 첫 대면이며 거대한 나라 미국과의 첫 만남이었다.
친구 원숙이는 자기 집에는 방이 많으니까 걱정말고 오라고 했다. 친구의 말대로 브라운 스톤 빌딩 층층마다 방은 참 많았지만, 방 다운 방은 없었다. 지하실부터 옥상까지가 공사 중이었다.
층 마다의 대리석 화장실이 있고 음식이 오르내리던 도르레식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고 하인과 마부들이 드나들던 뒷 문 밖으로 말이 들어올 수 있는 마당이 있는 브라운 스톤 건물의 전성시대가 능히 상상이 된다. 클로젯에서는 100년된 신문 조각도 나왔다. 원숙이는  횟가루 범벅이 되어 벽과 바닥과 천정을 뜯으며 5층짜리 맨션의 구석구석을 자기 것의로 만들어 나갔다.
이 집에는 나 말고도 한국서 유학온 신학생과 세탁소 다니던 그의 아내, 전시하러 왔다가 뉴욕에 반해 주저 앉은 화가 변종곤 씨가 있었고 가끔씩 집 나온 고등학생이 와서 살기도 했다. 그 당시 뉴욕에 살던 화가, 무용가 연극인들도 자주 드나 들었다.
내가 다니던 ‘아트 스튜던트 리그 어브 뉴욕’ 앞 카네기 홀이 있는 57가 거리에는 정말로 밍크 코트 입는 남자가 걸어다니고 악기를 맨 음악도와 화구를 든 미술학도들이 많았다. 우물 안에 있던 내가 센트럴 파크에가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에 어리둥절 하던 때다. 뉴욕과 아트와 젊음이 뒤 섞인 그 곳에서의 매일 매일은 어제와 전혀 다른 예상 못한 오늘이 되곤 했다. 바로 그런 식으로 결혼을 했고 142가 517번지 에 풀어 놨던 이민가방을 다시 싸들고, 8개월 만에 내가 살던 집을 떠났다.
지금은 그 곳에서 허드슨 강을 따라 곧장 또 100 블럭 정도 북쪽에 있는 한적한 동네 웨체스터에 산지 30년이 넘었다.
맨 처음 살던 4층 화장실을 개조한 내 방에서 얼마 후에 옮겨 간 1층 넓은 리빙 룸 한쪽을 막은 문간 방, 손님들이 오면 친구랑 같이 커다란 냄비에 음식을 만들었던 지하실 부엌이 생생하다. 어둑할 때에는 138가에서 버스를 내려 전화를 하면 신학생 아저씨가 개를 끌고 나를 데리러 오던 으시시하던 스페니쉬 할렘이 마치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서울처럼 그립다. 
언덕 넘어 혜화 국민학교를 다니던 명륜동,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걷던 경복궁 옆 동네 신교동, 어두운 밤 개천 건너 귀가하던 대학시절의 정능 집 처럼 142가 517번지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의 고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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