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26, 2015

흰 테두리의 빨간 튜울립

흰 테두리의 빨간 튜울립


나를 뉴욕에 도착한 첫날 밤으로 되돌려 준 것은 황규백 씨의 튜울립 판화이다. 손바닥 보다 조금 큰 그림 속에 그려진 한 송이 튜울립은 꽃 잎 가장자리에 하얀 테가 둘러 있다. 미국에 오자마자 본 바로 그 튜울립 꽃이다. 꽃 잎의 끄트머를 흰 페인트의 붓이 살짝 터치하고 지나간 듯한 빨간 색 튜울립!

지방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고속버스 타는 일에 싫증이 날 무렵 미국에 한번 가 볼까 마음 먹었다. 친구 원숙이가 미국에 오라 오라 했어도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유학을 하고 오면 혹시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갈 수있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비행기 타야 가나보다 하던 시절에 더구나 노처녀에게는 안 나온다는 비자를 운 좋게도 즉석에서 받았고, 홀트 아동기관으로 비행기 표도 반 값으로 쉽게 비행기를 탔다.
말이 잘 안 통하는 캐나다인 신부와 나는 역시 말이 안 통하는 입양아 세 명을 맡았다. 신부님이 남자 아이를 맡겠다고 해서 왕왕 우는 서 너 살짜리 여자애와 갓난 애기는 내 차지가 되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뒷 자석에서 잠시도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여자 애를 멕여주고 달래서 재워주고 그리고 찡찡거리는 애기 기저기 갈고 젖병 물려 주는 일을 했다. 승객들이 우리를 보고 ‘쯔쯔’하는 것이 꼭 나에게 하는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 애들 봐주는 일에 쩔쩔맷다.
케네디 공항에서 아이들을 미국 사람에게 넘겨 줄 때에는 속이 다 시원했다. 제일 늦게 나오는 나를 손을 흔들며 맞이 하는 원숙이를 보고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차 속에서 원숙이가  ‘ 저기가 맨해튼이야’, '저기가 양키 스테디움이야.’하면 멍하니 바라 보기만 했다. 하이웨이를 달리고 다리를 건너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고도 한참 만에 친구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머리 속은 백지였다.  
그런데 정신이 바짝 들었다. 차가운 2월의 밤 공기 때문이 아니다. 누런 가로등 불 빛에 어렴풋이 비치는 시커먼 건물 하나가 원숙이의 집이다.  거리는 마치 전쟁을 치룬 듯 했다. 묵직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 서는데 집안은 폐허 그 자체였다.  
화가의 꿈을 안고  미국에 유학 온 원숙이가 100년 된 낡은 집을 사서 남편이랑 직접 고치고 있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 잘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상상을 초월한 광경이었다.  ‘여기가 미국이란 말인가.’
우리는 삐꾹거리는 층계를 올라가고 또 올라가 어느 방 앞에 멈추었다. 편지에 ‘네 방을 만들어 놨어’했던 그 방인줄 짐작할 겨를도 없이 원숙이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향내가 풍기는 환한 방이 요술처럼 나타났다.
높은 천정에서 부터 길게 내려 뜨려진 우유빛 레이스 커텐과 그 앞에 놓인 한 송이 빨간 튜울립이 눈에 확 들어 왔다. 꽃 잎에 하얀색 테두리가 둘려 진 생전 처음 보는 튜울립이었다. 그제사 내가 딴 나라에 왔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벽에는 연 보라빛 은행 잎이 흩날리듯 그려져 있었고, 침대에는 옅은 주황색과 옅은 밤색이 체크 무늬 이불보가 덮혀있다.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보던 방이다.황홀했다.
문을 막아 놓은 판자를 뜯어 내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치우면서 우선 전기 공사부터 했다는 그 혼란 통 속에서, 원숙이는 벽에다 은행 잎을 그리고 백화점에서 주는 향수 쌤플 종이를 꽂으며 내가 이 방에 들어서는 그 순간을 기대한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밀크 박스를 겹쳐 만든 침대에 누어 곧장 잠이 들었다.


쏜 살 같은 시간을 쫓아 살던 어느 날, 선물 받은 그림의 포장을 뜯다가 깜짝 놀랐다. 흰 테두리의 빨간 튜울립!  아니 그 꽃 아닌가. 그림 속 창가에 놓인 튜울립 한 송이! 파김치가 된 나에게 낯 선 나라를 일깨워 준 꽃. 뉴욕에 도착한 날 방문을 열었을 때 요정처럼 나를 맞이 하던 하얀 테두리의 튤울립과 이렇게 재회를 한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이 튜울립을 여러번 봤을 테지만, 그 날하고 연결이 되지는 않았었다. 황규백 화백이 선택한 꽃과 그림을 그리는 내 친구가 나를 위해 선택한 꽃이 똑 같다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두 사람의 예술적 영감에 내가 끌려 들어간 것일까.
깜깜한 밤에 불쑥 튀어 나온 듯한 꿈 같이 아름다운 방의 감격을 그대로 담고있는 이 그림은 늘 내 곁에 있다. 그림속 흰테두리 튜울립을 볼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방의 그 튜울립은 금방 시들어 없어 졌지만, 친구 하나 믿고 무작정 비행기를 탔던 그 때의 내 마음은 시들지 않고 있다. 그림의 꽃이 시들지 않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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