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22, 2015

Locking Eyes with Columbus

There I was, grazing my hand along the robe of Christopher Columbus.
            My children had suggested that for my birthday we meet for dinner in Manhattan. That sounded like any other birthday; shouldn’t we do something special? That’s what I wanted to say, at least.
            I didn’t need a banquet in my honor, but it felt like my 60 years, which had passed in ebbs and flows like wind and waves, should be marked with something special. And they were, because I met Columbus.
While New York City was celebrating the 120th anniversary of it Columbus statue, I celebrated my own milestone.
The southwest corner of Central Park is known as Columbus Circle because of this statue. Even Mayor Michael Bloomberg, who lived in New York for five decades, confessed that he had rarely ever looked up at it. Most New Yorkers would probably say the same thing. In the countless times that I passed through the busy intersection, I never felt the urge to stop and consider the figure in the middle. I just lumped it in with all the other statues around the city.
This statue, that so many people had ignored, became the subject of sudden interest because of Tatsu Nishi, the Japanese artist who created the installation called “Discovering Columbus.”
After standing up high for over 100 years — in the snow, rain and wind — Mr. Columbus for the first time found himself in a warm home, a cozy living room. Once lonely atop his towering column, he was now being continuously sought out by visitors. Even after purchasing our tickets online, we had to endure a long, snaking line before climbing the temporary stairs and entering the room Nishi had built.
With a coffee table covered in magazines, a plush sofa, and a television set, it was like any other American living room. But in the center of it stood Columbus, enormous and proud — a truly extraordinary sight.
Paying no attention to the people crowding his room, Columbus stared into the distance. Can you see the land on the far end of ocean? As I approached closer, I noticed the sharp gaze of his eyes puncturing his concrete expression.
Those eyes discovered America.
Columbus landed on these shores in 1492. Almost 500 years later, in 1982, I landed in New York. In 1952, 60 years after the statue of Columbus was erected, I was born, and today, exactly 60 years later, I was standing in front of him.
When I rested my hand on his robe, I sensed through my fingers that this was a new land for us both. And, in a way, it was thanks to him that I was able to be here. Because I was born in the same season as Columbus Day, I was able to view this exhibition on my birthday. Nishi, it turned out, was the same age as me.
These connections felt predestined.
After descending the stairs, we walked across the street to have dinner at an Italian restaurant inside the Time Warner Center. Sitting there, we could still see the lights in Columbus’ living room outside. It felt grander than receiving bows at a traditional banquet table.
To me, Columbus is no longer just a gray statue. He and I are now acquaintances. Though I doubt I will look into his piercing eyes again, we will always be connected. Now, whenever I pass through Columbus Circle, I lift my eyes to see him. He is still staring at the land on the far end of the ocean. What are you looking for? If not for you, would I be here now?

I look up with a glint in my eye.

Saturday, June 20, 2015

김송희 선생님

구슬을 끼우는 인연


시인 김송희 선생님과 나는 실에다 구슬을 한알 한알 끼우는 인연을 갖고 있다.
정확하게 27년 전, 친구 원숙이의 소개로 그 분을 만나 시화전 그림을 그려 드렸다.
신문 삽화를 그려 보겠냐고 권하셔서 한국일보사에 하루 나가서 한 주일 분 삽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미술 기사까지 쓰면서 사흘로 늘어 났다. 1 주일에 4번 출근하는 파트 타임 직은 없다고 해서 두 아이 놓고 기자노릇하기가 어렵긴 해도 풀 타임으로 일했다. 
김송희 선생님과 함께 보람 있고 즐겁게 신문 일을 했고, 나는 아직도 신문 일을 하고 있다.
선생님은 늘 나보다 반 발짝 앞에 서서 뒤를 돌아다 봐주시고, 또 반 발짝 뒤에서 내가 내 발걸음을 재촉하게끔 해주신다. 그것이 지금까지다.
이제 책 하나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하셨다.
책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민기적 거릴 때 마다 선생님은 고운 말씨로 권면해 주셨다.

뒤늦게 책을 엮는 다는 건 화가들의 회고(Retrospect)전 처럼 또는 가수들의 히트곡 (greatest hit )앨범처럼 지나간 세월을 한 자리에 모아 놓는 것과 같다.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고 있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글로 쓰다보니 누가 챙겨주지 않은 내 삶을 스스로 정리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 히트곡 앨범을 만들 듯 리스트를 작성해 나갔다. 아무도 안 알아주는 히트곡일지라도.
구구절절 인생조각들이 책 한 권에 모아졌다. 내 눈에는 오색의 구슬들로 끼어 만든 목걸이 같다. 
비단 채찍을 손에 들고 옆에 서 계셔 주신 김송희 선생님 덕분이다. 
28년, 29년, 30년....한알씩 한알씩 끼어나갈 인연은 다음 생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 때엔 내가 선생님의 선생님이 되어 드리면 좋겠다.



Friday, June 19, 2015

벌거 벗은 임금님

벌거 벗은 임금님


”정치 얘기와 종교 얘기는 하지마.” 가 금문률로 되어 있지만 정치와 종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네 인생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얘기가 잠깐 나오다가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하면 누군가가  ‘에구 정치얘기는 관두죠.’해서 중간에 말을 멈추고 나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 누구나 자기 생각과 다른 정치와 종교를 조금도 받아드릴 수가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에 한 사람과 종교얘기를 속 시원하게 나눈 적이 있다. “참 이상해요. 뻔히 알면서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 못하고 그냥 이중생활을 하게 되더라구요.” A 씨 자신의 표현으 로, ’긴 터널을 뚥고 나왔다.’면서 하는 말이다. 그 터널은 종교였다.
처음 만나고 곧 A는  나에게 책 한권을 빌려 주면서 가깝게 다가왔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에 책의 저자가 내 놓은 답은 그저 지금 그대로가 완전하니까 그대로 편하게 살라는거였다. 내 맘에 들었다. 우리는 책 내용을 전개 시켰다. 어느 교회를 열정적으로 오래 다니다가  고민 끝에 나왔다는 A와는  ‘진리가 뭔가’ ‘ 신이 뭔가’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이민생활 중에 친지들과 진지하게 나누어 보지 않는 이야기이다. 왠지 A에게서는 한가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돌진을 하던 여학교 때 친구가 생각났다. 커다란 눈에 왠지 가냘픈 분위기까지 내 친구를 닮은 A에게 나의 인생론을 펼치기도 했다.
세상은 정말 좁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제 3자를 통해 A가 말한 교회는 흔히 이단이라고 하는 종교단체였음을 알았다. 분명히 A는 교회에 혼신을 다했었고 그러다 우울증에 걸렸으며  답을 얻으려고 사방을 헤매다가  한국에 가서 비로서 내게 빌려줬던 그 책의 저자를 만나, ‘진리는  바로 이 순간에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런 이상한 종교단체에서 빠져 나올수 있었다는 것이.
그 다음번  만났을 때 나는  ㅇㅇㅇ라는 곳의 교인이셨다면서요?’  라고 말했다. 남들이 다 아는 비밀을 빨리 벗어 버리게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그 얼굴을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털 빠진 채 길가에 떨어져 비를 맞고 있는 참새가 연상이 되었다.  낚시 밥을 스스로 입에 물어 버린 소설 속의 여주인공같았다.
‘ 그동안 아주 길고 긴 깜깜한 터널을 지나온 것 같아요.’라며 자기모순의 정신적 고통을 털어놓았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생각했었다고 한다. 아직도 그 교회에는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말을 못하고 그대로 살고 있는 교인들이 있다고 했다. 속속들이 가식으로 꾸며진 것을 훤히 알면서도 자진해서 벌거벗은 임금님 옷이 근사하다고 아우성을 친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자기 얼굴에 가면을 쓰고 말이다. 가련한 여주인공 A가 , ‘야, 임금님이 벌거 벗었다아~.’ 외친 어리 소년이 된 것이다. 그러자니, 그 군중들 앞에서 털도 뽑혔으리라. 그 아픔들을 진리 추구의 정열로 버텨 냈는가 보다. 
한 동안 A와 좀 뜸하던 차에 그가 새롭게 어느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 잘  되었구나, ‘진리가 바로 내 안에 있다,'를 터득했으니 이제는 좀 편안하게 교인들과 사귀며 만족하는 생활을 하면 좋겠구나 했다. 하지만 뭔가가 석연치 않았던 것은 장로님이 자기의 집을 교회로 사용하며 온 교인이 가족처럼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 집 모게지는 누가 내는 데? 한 1년 쯤 후에 권사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축하해 줬는데 또 얼마가 지나서는 '노 선생님 말씀이 맞았어요.'라며 그 장로님과의 갈등으로 목사님이랑 함께 그 교회를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예 소식이 끊겼다. 나 역시도 연락하게 되질 않는다. 
우리가 종교 이야기로 마음이 통했던 것이 허상이었나 보다. 금문율이 맞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에 대한 것은 남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보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민주당이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공화당인 것 처럼. 내 남편과 내가 평행선을 그으며 한 지붕아래서 우파 좌파로 나뉘는 것 처럼 각각 자기 세계 속에서 사는 거다.
열정적인 성격의 내 여학교 친구와 참 많이 닮은 A와 언젠가는 다시 차를 마시면서 혹시 또 털이라도 뽑혀가면서 또 겪어 낸 종교이야기...... 결국은 답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눠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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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웨이크닝

어웨이크닝 awakening


소설가 케이트 쇼팽이란 이름을 북클럽에서 처음 들었다.
1899년 발표 된 ‘어웨이크닝’이란 작품은 악평을 받았다고 한다. 주인공 여성이 보통 가정의 정숙한 부인으로서는 생각 할 수 없는 자유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1879년 노라가 집을 뛰쳐 나갔다는 이유로 연극 공연까지 취소되었던 ‘인형의 집’ 이후 아마도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여자가 남자의 인형노릇에서 벗어난 이야기였는가보다. 어쨋든 웬만큼 작가로서 알려져 있던 케이트 쇼팽은 그 소설로 인해 출판계에서 외면을 당했고 5년후에는 세상을 떠난다. 

잊혀졌던 ‘어웨이크닝’이 70여년이 지나 재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특히 패미니스트들에게는 필독서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북클럽 선생님인 영문학 교수는 이 책을 대학 1학년 때 과제로 읽었는데 20대인 그 때 여자로서의 삶에 대해 뭘 알고 숙제까지 써 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노년에 가까운 북클럽 맴버들은 가정에서 부터 남녀 불평등을 겪는 이야기와 요즘 한국의 젊은 여자들이 커리어를 갖기보다는 돈 많은 남자에게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할 수 없이 인형으로 사는 것 하고 자진해서 새장 속으로 들어가는 새하고는 천지차이다. 하긴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이 인형인줄 모르고 살고 있다. 까마득한 원시시대 언젠가에 모계사회가 있었다고 배웠다. 그것이 무슨 이유로 끊어져 버렸는지 모르지만 창세기부터  이 세상은 남자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 100년도 안 됀 짧은 역사 속에 여성의 위치가 조금씩 변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100년 세월이 더 걸리면 남녀가 완전 평등한 사회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과연 남녀 평등이라는 것이 존재할런지.
케이트 쇼팽은 여자가 남자의 종속 물로 살고 있는 것에서부터 나오라고 외쳤을까? 아니다,
주인공 에드나 폰티엘리가 어느날 밤 울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감정의 움직임에 충실하여 외간 남자를 불러 내고, 서서히 남편에게서 독립하는 것 까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까지, 케이트 쇼팽은 여자에게 '깨우치라'고 속삮이고 있었다.
'…………. 한마디로, 미세즈 폰티엘리는 이 우주속에서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이 세상과 자신과의 관계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28살이라는 젊은 여성이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지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여성들에게나 내려주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신 지혜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다…………'
어린시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 뛰쳐 나와 초원을가로 질러 뛰어 간 일을 회상하는 에드나는, 그 때 처럼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목적없이 안내자 없이 초록색 들판을 뛰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유독 여자여서만은 아니다.우리는 뚜렷한 의식을 갖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끈에 메여 살고 있지 않은가.  불행으로 끝나는 소설의 주인공은 적어도 생애 처음으로  ‘자유’의 느낌을 누린다. 1899년에는 여자가 자유의 느낌을 맛 본것을 탓했다. 지금은 달라진 세상이다. 여자가 자유롭게 산다지만, 과연 나는 진정한 '자유'를 알고 있는가. 진정한 자유를 누려봤을까?

케이트 쇼팽이 말하는 것은 여성이건 남성이건 이미 세세히 그어진 인생잣대에서부터의 순수한 해방이 아닐까.

어웨이크닝을 읽으며 내 자신이 새삼스럽게 어웨크닝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 눈 앞에서 온 세상이 뱅뱅 돌며 시시각각으로 요동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진정으로 내가 찾아내야 할것은 내 자신이며 그것을 각성하는 일이 급하다는 생각이다. 짧은 인생을 산 케이트 쇼팽이 흘리고 간 한마디 ‘어웨이크닝’이 60년 넘은 나른한 잠에서 나를 깨워준다.


Friday, May 29, 2015

맨해튼 재 상경


저렇게 많은 방 중에 내 방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늘 높이 솟은 빌딩의 창문 수는 갠지스 강의 모래 만큼이나 많고 밤이면 은하수를 끌어 당긴 듯 빌딩의 불빛이 영롱하다.
맨해튼은 나의 이상향이다. 무릉 도원이며 에덴 동산이다.
하지만 아틀랜틱 바다 속의 아틀랜티스인가 아련하기만 하다.
무작정 상경으로 뉴욕에 오자마자 원숙이와 함께 57가에서부터 5 에브뉴를 따라 월드 트레이드 쎈터까지 걸었다.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에서 립스틱을 발라 보고, 디스카운트 스토어 ODD JOB에서 1달라 짜리 스카프를 하나씩 사 두르고 챠이나 타운에 가서 피넛 소스의 국수를 먹었다.
‘이거봐  맨해튼이 고구마 같이 생겼지. 남북으로 길게 난 길은 에브뉴, 동서로 난 길은 스트릿이야.’ 거의 매일 십자수를 놓는 것 처럼 한블럭 한블럭 씩을 돌아 다녔다. 뮤지움과 갤러리,백화점과 부티크와 도매상과 꽃 시장, 핫 독 스탠드와 피자와 베이글. 화가 변종곤 씨의 팔뚝을 부여잡고 걸었던 대낮에도 음산한 할렘의 모닝 사이드 거리. 한 블럭마다 다른 한 세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상상했던 미국이 아니었다.
파슨스 스쿨 입학원서를 내러 갔을 때 뉴욕이 어떻냐는 접수원의 물음에 ‘컨퓨전.confusion’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러면 그렇지. '하듯이 웃었다. 그 당시 나의 생활은 그 혼동을 하나씩 헤쳐가는 작업이었다. 메디슨 에브뉴가 명동거리처럼 내 눈에 익어 갈 무렵 맨해튼을 떠났다.
그 때는 몰랐다. 내가 맨해튼을 좋아한 줄을.  
답답했던 한국에서부터 확 놓여난 자유함을 누렸던 때문일까. 아니면 한껏 누려보지도 못하고 더 답답한 세상으로 들어 간 못 다한 아쉬움인가.시간이 갈 수록 이스트 사이드 웨스트 사이드 업타운 다운타운 구석구석에 향수가 쌓이기 시작했다. 
30년이 지난 요즈음도 맨해튼을 갈 때마다 항상 짝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지만 그는 나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랜드센트럴 역에서 거리로 나서자 마자 눈 앞을 가로막는 빌딩 아래 자동차로 꽉 메워진 거리와 프렛쯜 굽는 냄새 속으로 왠지 좀 외롭게 들어 선다. 내가 한 없이 작아진다. 누구도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바로 그 무관심인가 보다. 내가 맨해튼을 좋아하는 이유가.
나를 내버려 둬 주는 친절한 무관심이다. 여기서는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고 그 눈치를 내가 알아채야 하는 일도 없다. 내가 오로지 나 일수가 있는 자유를 맛보는 것이다.
미국 속의 한국인도 아니고, 딸도 엄마도 언니도 와이프도 며누리도 아닌 나, 선생님도 집사님도 아닌 나.
젊은이들이 제각각의 방향으로 흩어져 가는 한 이스트 빌리지에라도 가면, ' 새로 시작할 수 만 있다면......'잠자고 있던 에너지가 솟는다. 마음의 늪을 떠나 온 철새의 둥지 같은 '내 방이 하나 있다면.'  빌딩의 숲을 바라본다.
언젠가는 저 곳으로 재 상경하리라.

Saturday, May 23, 2015

자화상

자화상


수필은 자화상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자기가 그린 자화상이다. 
내가 쓴 글자 하나하나에서 내 얼굴을 피할 수 없다. 어느 날 사진을 보고 ‘이게 나란 말인가?’ 깜짝 놀라듯이 내가 쓴 글이 낯 설기만 할 때가 있다. 엉뚱한 말이 쓰여있고 어설프기만 하다. 그러나 구구 절절 내 모습이 서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당에 돋은 잡풀에서부터 우주 끝까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나의 모양을 담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고 시를 읽으며 시를 쓴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기가 쉽지 않지만 수필을 읽으면 금방 수필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 어디 사는지 몇 살인지 뭘 하는지 금방 알수 있다.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 인생철학은 어떠한지 글 쓴 사람의 사생활을 훤하게 알게 된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자기가 다 털어놓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필은 자기 얼굴이다. 화가 난  할아버지 같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서부터 귀에 붕대를 감은 고호, 심장에서 피가 흐르는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처럼 자화상이라고 불리우는 그림 속 얼굴들은 하나도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이상한 표정들이다.
화가들은 남의 초상화는 아름답게 그렸어도 자기 얼굴은 있는 그대로 그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린다.
왜 그렇게 많은 화가들이 자기 얼굴을 그릴까? 모델이 없어서는 아니다. 고호는 2000개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나르시스의 후예들이기 때문일까. 아니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기를 몰라 봤다. 화가들은 자기 얼굴을 안다. 잘 알면서도 자기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 과연 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어떤 모습을 한 인간일까......
어쩌면 자기를 그리면서 자신에게 대한 불만을, 때로는 그런 자신에게 대한 연민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갈팡질팡 하는 삶 속에서 진짜 자기를 찾고 싶은 것일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이유는 나 없이는 세상 또한 없기 때문이다. 
15세기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자화상에다 ‘1433년 10월 21일, 얀 반 에이크가 나를 제작했다.’고 사인대신 적어 놓았다. 
그렇다. 수필도 나를 제작해 내는 일이다.
하얗게 빈 공간을 내가 살고 있는 공간으로 채우기 위해 자판기를 두드린다. 흔들리는 나무잎 같은 생각과 출렁이는 물결 같은 마음을 손가락에 묻혀 써내려간다. 글자로 채워지는 화면 위로 위로 어른대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윤동주 씨의 자화상 속 ‘한 사나이’ 대신 한 여자를 넣어 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여자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여자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여자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여자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여자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여자가 있습니다.

수필을 쓰면서 자꾸만 한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가 지겨워져서 외면해보지만 그래도 안타까와 어쩔수 없이 다시 돌이켜 그 여자를 찾는다. 수필은 보기 싫은 모습까지 그려내는 나의 자화상이다.

Friday, April 10, 2015

뮤지움 데이

뮤지움 데이


미국 신문에 난 LEE UFAN 이라는 이름을 이우환 이라고 읽는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아, 이분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던가. 구겐하임에서 우리나라 화가의 특별 전시를 하기는 백남준 회고전 이후 처음이다.
때를 맞추어 건너 편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에서 하는 한국의 분청사기 전의 기회를 놏치지 않고 문우들이1석 2조 ‘뮤지움 데이’를 하자고 했다. 미술대학 나왔다고 내게 안내를 해 달라는 것이다.
분청 사기는 아무런 걱정도 하질 않았다. 그러나 이우환 씨가 붓으로 툭툭툭 점을 찍어 놓은 그림이나 뎅그러니 바위 덩어리 하나를 갖다 놓은 추상 예술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인터넷 만 열면 이우환 예술론이 수두룩하지만 문제는 읽어도 잘 모르겠다는 데이 있다.
뉴욕 전시를 위해서 롱 아일랜드 햄튼 바닷가에서 바윗돌을 골랐다는 이우환 씨는 신문 인터뷰에 " 이태리 투스카니의 돌, 불란서의 돌 그리고 영국의 돌이 모두 다 다릅니다. 각자가 그 지방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요.’라고 했다. 당연한 얘기다. " 햄튼은 바위 돌을 찾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여기에 네 번이나 왔어요." 라고 한 것도 당연한 소리다. 산더미 같이 쌓인 바윗 돌 중에서 단 번에 마음에 딱 드는 것 하나를 고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이우환 씨의 작품 해석들은 어째서 난해하기만 할까. 
뮤지움 데이 전날 나 혼자 먼저 구겐하임 뮤지움엘 갔다. 뮤지움 데이를 잘 이끌어나갈 쉬운 길이 있을까 찾아 보고 싶었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쉬어야 한다는 것이 내 철학이기도 하다. 구겐하임에 가서는 그 동안 줏어 들었던 이우환의 예술론 같은 것을 애써 털어버렸다. 
전시장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인 듯한 바위들을 내 눈 높이에서 천천히 바라봤다. 비 바람이 깍아 놓은 돌 덩어리의 완만한 곡선을 따라 날카로운 눈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을 두어본다. 빙글게 도는 언덕을 올라 가면서 마주치는 이우환 씨의 점하나 바위 하나라는 개성있는 개체들이 평범하게 바뀌어 가는 걸 경험했다. 정교하게 계산되어져 나온 작품 하나하나가 명상의 대상이 되어갔다.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찾는 대상이다. 이것이 내가 본 이우환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우환이 될지 그건 그들의 몫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뮤지움 데이' 날 많은 사람이 모였다. 나는 말했다. " 뭔가 대단하려니 기대를 했다가는 어쩌면 실망을 할지도 몰라요.  바위 덩어리나 점 몇 개가 뭘 그리 대단한가 실망이 될 수도 있구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전혀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마세요." 선입관을 버리자는 얘기다.
" 자, 우선은 저 바위를 한번 바라 보세요. 무슨 생각이 드세요?" 했다.
미술관엘 가면 작품들을 그냥 훑어 보기 일수다. 일단은 방대한 숫자에 압도되어 무엇부터 봐야 할지 모른다. 어떤 그림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고, 잘 모르는 작품은 몰라서 휙 지나가게 된다. " 천천히 보세요. 첫 느낌이 무엇이었나 생각해 보세요." 했다.
모두들 전시장 입구에 엇비슷이 하게 놓인 두 개의 바위 덩어리 앞에서 한참을 바라본다. 한 사람이 입을 연다. ‘이건 아마 남자 여자를 상징하는 건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말한다. ‘남과 북의 대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보는 사람 성격에 따라 묵직한 바위 덩어리는 남녀의 사랑이 되고, 갈라진 한반도가 되기도 했다. 누구는 자연의 위력이라고도 했다.
이런 식으로 이우환씨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특별한 안내가 필요 없었다. 줄줄이 그어진 긴 붓 자국이나 톡 하니 찍힌 점이나 내가 ‘아하. ’ 하는 순간에 작품으로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설명이 생략된 이우환 씨의 작품은 각자가 나름대로 해석하면 된다. 거울을 조각내며 떨어져 내려 앉은 돌맹이 조차도 뭔가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보인다. 동양의 철학이다.
삼삼 오오 자유롭게 전시장을 걸으며 서로 느낌을 주고 받는 문우들의 진지함에 나의 안내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안심을 했다.
예술의 에너지가 충전된 발걸음은 한 여름 뜨거움도 아랑곳 없이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으로 향했다.
조선시대 시골 아낙네같은 분청사기들이 거대한 규모의 박물관 작은 방에서 수더분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마음이 풀어지며 반가왔다. 장인들이 쉽게 빚어낸 그릇들을 쉽게 감상했다. 백자나 청자와는 달리 얼마든지 내 맘대로 써도 될 것 같은 그릇들이다. 
흙 한 줌을 적당히 손으로 빚고 심심해서 몇 개의 붓 자국을 낸 분청사기와 철학적 심오한 의미를 담은 이우환 씨의 붓 자국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한국이라는 테두리을 긋고 있었다.
이만하면 뮤지움 데이는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Wednesday, April 8, 2015

구름에 달 가듯이

구름에 가듯이

          '  따라서 가다가 바닷가 마을 지날 때 착한 마음 씨의 사람들과 밤 새워 얘기하리라......' 대학 때 친했던 가수 이광조의 대뷰 곡 노래 말 처럼 유유자적  나라 유럽을 다녀왔다. 매일 매일 해야 할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렇게 방랑객 처럼 길을 떠날 있었던 것은 만큼 오랜 세월 쌓여진 여행에의 갈망이 이상 숨을 참지 못했던 때문이리라.
          방학이면 의례히 인천 해수욕장, 덕적도, 설악산, 온양 온천 같은 휴양지라든가 친구네 과수원엘 가서 며칠 놀고 왔다. 회사를 다닐 때에도 끄덕하면 지방 출장을 가던 나에게 어머니는 잘도 다닌다. 여행이라고는 피난 밖에 못가 봤는데.’하셨다.
          그러다가 아주 여행이 미국으로 오고 말았다.
          곳엘 보는 것하고 곳에서 사는 것하고는 천지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젊은 시절 막연히 동경하던 미국이 치열한 삶의 장소가 되어 버렸고 여행을 다니는 마음의 사치는 사라져 버렸다. 가끔 식구가 여행을 다니긴 했어도  살림을 객지로 옮겨 가는 일이었다.
          한참을 살고 둘러 보니 남들은 여행을 많이 다니고 있었다. 세계 구석구석을 안 가본 곳이 없는 같았다. 내가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유럽도 그들은 벌써 오래 전에 다들 다녀 오고 나서는 이제는 다시 동유럽이다, 북유럽이다 나누어 샅샅이 다녀들 온다. 대부분이 단체 여행들이다. 여행사들이 한국신문에 전면 광고를 하는 이유를 같다. 그러나 왠지 나는 어릴 부터 책으로 상상하던 멀고 먼 나라의 이미지를 수학 여행처럼 다니면서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함께 여학생인 내게 환상의 세계로 다가 왔던 유럽이다. 전혜린이란 이름 만으로도 깊은 지성과 열정이 떠오르지만, 내가 그에게서 얻은 것은 정열도 학구열도 아니었고 그저 유럽 나라에 보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소설 속의 나라가 아니라 한국의 젊은 여자가 직접  온 몸으로 경험해 낸 곳인데 나라고 못 갈까...라는 동경이었다.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 그 곳에 모인 베레모 쓴 아티스트들, 중세의 낡은 건물들이 줄지은 거리. 짙은 회색 빛 음울함으로 써 내려 간 전혜린의 글 속에서 나는 오로지 유럽의 낭만 만을 찝어 냈었다.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 발을 디딘 곳은 친구와 함께 간 비엔나였다. 친척 유학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기차를 타고 빠리와 스페인, 포르투갈을 구경했다. 30년 전이다. 우리는 온갖 실수를 저지르며 모짜르트의 무덤을 찾아 갔고 피카소 집을 가려다가 빠리의 골목길을 헤메었다. 바르셀로나 식당에서는 말이 통해 남이 먹는 것을 손으로 가르켜 시키기도 했다. 전기 난로를 두었던 리스본 어느 뮤지움, 메트로를 타고 간 빠리의 벼룩시장 들이 전리품 처럼 기억의 창고에 들어 있다. 때문에 유럽에 다녀 적이 있지만, 모두 3,4 빠듯한 여정이었다.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 파 뭍혀 버리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지만 실현이 어려웠다. 나이 드신 어머니를 보러 한국엘 자주 가게 되니까 남편을 두고 또 놀러 다닌다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그러던 차에,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한 보김 씨의 느닷 없는 여행 제안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이렇게 떠나는 길은 어디라도 좋았다. 보김 씨가  알고 있는 유학생도 볼겸 영국 버밍햄으로 가는 길에 이스탄불을 들리자고 했다. 
영국에서는 셋이서 스코틀랜드까지 1주일 동안 차로 돌아 다녔다. 하루는 나 혼자서 계획에 없던 런던다녀왔다그야말로 발 가는 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 다녔다.
런던 고속버스 터미날에 내려서는 지도 한장을 들고 용감하게 빅토리아 거리로 나섰다. 소멸해가던 젊음이 살아 났다아무런 관광 명소도 찾아 보지 않고 곧장 테임즈강을 건너 ‘테이트' 뮤지움 향해 하염 없이 걸었다. 강변 헌책 노점 상에서 책들을 둘쳐 보고, 배고플 때에 친구가 싸준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아, 이런 곳이구나. 현대 미술의 높은 성곽이기도 한 ‘테이트 모던 진미는 잠깐 사이에도 충분히 전해진다. 이날 런던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고속 버스터미날로 돌아 가는 택시 안에서 내다 보이는 화려한 궁전을 운전수에게 물어 보니버킹검 팰러스.라고 했다.  빨간 모자를 군인들이 교대하는 장면을 보진 못했지만 이 또한 전리품이다.
어둑어둑해진 버밍햄에 와서는 아침과는 반대 방향으로 마을 버스를 타고 150년 된 하숙집으로 돌아 왔다.  친구가 특별히 만든 두툼한 햄과 라면 정식에 와인 까지 곁들인 성찬에 느슨이 피곤이 몰려 들었다.  
뉴욕으로 돌아 오는  남편에게 텍스트 메세지 보냈다. ‘뭐니 뭐니 해도 당신 덕이야.’ 
케네디 공항에서 웃는 얼굴로 반겨주는 남편과 동네 식당에서 가서 이거 먹을까 저거 먹을까…. 스트레스를 쌓는 일상을 기분 좋게 시작했다.
'가다가다가 지치면 다시 돌아 오리라. 웃는 얼굴로 반겨 주는 그대의 정든 품으로......' 노래 말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2011년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문인극 대본/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등장인물 :   앙드레 지드, 나레이터, 시인 1, 2, 3, 4, 5, 6 …가수, 무용수 장면 :   거리의 카페 …테이블, 의자, 가로등… 정원 ….꽃, 화분, 벤치  숲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