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10, 2015

뮤지움 데이

뮤지움 데이


미국 신문에 난 LEE UFAN 이라는 이름을 이우환 이라고 읽는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아, 이분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던가. 구겐하임에서 우리나라 화가의 특별 전시를 하기는 백남준 회고전 이후 처음이다.
때를 맞추어 건너 편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에서 하는 한국의 분청사기 전의 기회를 놏치지 않고 문우들이1석 2조 ‘뮤지움 데이’를 하자고 했다. 미술대학 나왔다고 내게 안내를 해 달라는 것이다.
분청 사기는 아무런 걱정도 하질 않았다. 그러나 이우환 씨가 붓으로 툭툭툭 점을 찍어 놓은 그림이나 뎅그러니 바위 덩어리 하나를 갖다 놓은 추상 예술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인터넷 만 열면 이우환 예술론이 수두룩하지만 문제는 읽어도 잘 모르겠다는 데이 있다.
뉴욕 전시를 위해서 롱 아일랜드 햄튼 바닷가에서 바윗돌을 골랐다는 이우환 씨는 신문 인터뷰에 " 이태리 투스카니의 돌, 불란서의 돌 그리고 영국의 돌이 모두 다 다릅니다. 각자가 그 지방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요.’라고 했다. 당연한 얘기다. " 햄튼은 바위 돌을 찾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여기에 네 번이나 왔어요." 라고 한 것도 당연한 소리다. 산더미 같이 쌓인 바윗 돌 중에서 단 번에 마음에 딱 드는 것 하나를 고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이우환 씨의 작품 해석들은 어째서 난해하기만 할까. 
뮤지움 데이 전날 나 혼자 먼저 구겐하임 뮤지움엘 갔다. 뮤지움 데이를 잘 이끌어나갈 쉬운 길이 있을까 찾아 보고 싶었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쉬어야 한다는 것이 내 철학이기도 하다. 구겐하임에 가서는 그 동안 줏어 들었던 이우환의 예술론 같은 것을 애써 털어버렸다. 
전시장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인 듯한 바위들을 내 눈 높이에서 천천히 바라봤다. 비 바람이 깍아 놓은 돌 덩어리의 완만한 곡선을 따라 날카로운 눈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을 두어본다. 빙글게 도는 언덕을 올라 가면서 마주치는 이우환 씨의 점하나 바위 하나라는 개성있는 개체들이 평범하게 바뀌어 가는 걸 경험했다. 정교하게 계산되어져 나온 작품 하나하나가 명상의 대상이 되어갔다.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찾는 대상이다. 이것이 내가 본 이우환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우환이 될지 그건 그들의 몫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뮤지움 데이' 날 많은 사람이 모였다. 나는 말했다. " 뭔가 대단하려니 기대를 했다가는 어쩌면 실망을 할지도 몰라요.  바위 덩어리나 점 몇 개가 뭘 그리 대단한가 실망이 될 수도 있구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전혀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마세요." 선입관을 버리자는 얘기다.
" 자, 우선은 저 바위를 한번 바라 보세요. 무슨 생각이 드세요?" 했다.
미술관엘 가면 작품들을 그냥 훑어 보기 일수다. 일단은 방대한 숫자에 압도되어 무엇부터 봐야 할지 모른다. 어떤 그림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고, 잘 모르는 작품은 몰라서 휙 지나가게 된다. " 천천히 보세요. 첫 느낌이 무엇이었나 생각해 보세요." 했다.
모두들 전시장 입구에 엇비슷이 하게 놓인 두 개의 바위 덩어리 앞에서 한참을 바라본다. 한 사람이 입을 연다. ‘이건 아마 남자 여자를 상징하는 건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말한다. ‘남과 북의 대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보는 사람 성격에 따라 묵직한 바위 덩어리는 남녀의 사랑이 되고, 갈라진 한반도가 되기도 했다. 누구는 자연의 위력이라고도 했다.
이런 식으로 이우환씨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특별한 안내가 필요 없었다. 줄줄이 그어진 긴 붓 자국이나 톡 하니 찍힌 점이나 내가 ‘아하. ’ 하는 순간에 작품으로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설명이 생략된 이우환 씨의 작품은 각자가 나름대로 해석하면 된다. 거울을 조각내며 떨어져 내려 앉은 돌맹이 조차도 뭔가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보인다. 동양의 철학이다.
삼삼 오오 자유롭게 전시장을 걸으며 서로 느낌을 주고 받는 문우들의 진지함에 나의 안내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안심을 했다.
예술의 에너지가 충전된 발걸음은 한 여름 뜨거움도 아랑곳 없이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으로 향했다.
조선시대 시골 아낙네같은 분청사기들이 거대한 규모의 박물관 작은 방에서 수더분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마음이 풀어지며 반가왔다. 장인들이 쉽게 빚어낸 그릇들을 쉽게 감상했다. 백자나 청자와는 달리 얼마든지 내 맘대로 써도 될 것 같은 그릇들이다. 
흙 한 줌을 적당히 손으로 빚고 심심해서 몇 개의 붓 자국을 낸 분청사기와 철학적 심오한 의미를 담은 이우환 씨의 붓 자국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한국이라는 테두리을 긋고 있었다.
이만하면 뮤지움 데이는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Wednesday, April 8, 2015

구름에 달 가듯이

구름에 가듯이

          '  따라서 가다가 바닷가 마을 지날 때 착한 마음 씨의 사람들과 밤 새워 얘기하리라......' 대학 때 친했던 가수 이광조의 대뷰 곡 노래 말 처럼 유유자적  나라 유럽을 다녀왔다. 매일 매일 해야 할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렇게 방랑객 처럼 길을 떠날 있었던 것은 만큼 오랜 세월 쌓여진 여행에의 갈망이 이상 숨을 참지 못했던 때문이리라.
          방학이면 의례히 인천 해수욕장, 덕적도, 설악산, 온양 온천 같은 휴양지라든가 친구네 과수원엘 가서 며칠 놀고 왔다. 회사를 다닐 때에도 끄덕하면 지방 출장을 가던 나에게 어머니는 잘도 다닌다. 여행이라고는 피난 밖에 못가 봤는데.’하셨다.
          그러다가 아주 여행이 미국으로 오고 말았다.
          곳엘 보는 것하고 곳에서 사는 것하고는 천지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젊은 시절 막연히 동경하던 미국이 치열한 삶의 장소가 되어 버렸고 여행을 다니는 마음의 사치는 사라져 버렸다. 가끔 식구가 여행을 다니긴 했어도  살림을 객지로 옮겨 가는 일이었다.
          한참을 살고 둘러 보니 남들은 여행을 많이 다니고 있었다. 세계 구석구석을 안 가본 곳이 없는 같았다. 내가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유럽도 그들은 벌써 오래 전에 다들 다녀 오고 나서는 이제는 다시 동유럽이다, 북유럽이다 나누어 샅샅이 다녀들 온다. 대부분이 단체 여행들이다. 여행사들이 한국신문에 전면 광고를 하는 이유를 같다. 그러나 왠지 나는 어릴 부터 책으로 상상하던 멀고 먼 나라의 이미지를 수학 여행처럼 다니면서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함께 여학생인 내게 환상의 세계로 다가 왔던 유럽이다. 전혜린이란 이름 만으로도 깊은 지성과 열정이 떠오르지만, 내가 그에게서 얻은 것은 정열도 학구열도 아니었고 그저 유럽 나라에 보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소설 속의 나라가 아니라 한국의 젊은 여자가 직접  온 몸으로 경험해 낸 곳인데 나라고 못 갈까...라는 동경이었다.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 그 곳에 모인 베레모 쓴 아티스트들, 중세의 낡은 건물들이 줄지은 거리. 짙은 회색 빛 음울함으로 써 내려 간 전혜린의 글 속에서 나는 오로지 유럽의 낭만 만을 찝어 냈었다.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 발을 디딘 곳은 친구와 함께 간 비엔나였다. 친척 유학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기차를 타고 빠리와 스페인, 포르투갈을 구경했다. 30년 전이다. 우리는 온갖 실수를 저지르며 모짜르트의 무덤을 찾아 갔고 피카소 집을 가려다가 빠리의 골목길을 헤메었다. 바르셀로나 식당에서는 말이 통해 남이 먹는 것을 손으로 가르켜 시키기도 했다. 전기 난로를 두었던 리스본 어느 뮤지움, 메트로를 타고 간 빠리의 벼룩시장 들이 전리품 처럼 기억의 창고에 들어 있다. 때문에 유럽에 다녀 적이 있지만, 모두 3,4 빠듯한 여정이었다.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 파 뭍혀 버리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지만 실현이 어려웠다. 나이 드신 어머니를 보러 한국엘 자주 가게 되니까 남편을 두고 또 놀러 다닌다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그러던 차에,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한 보김 씨의 느닷 없는 여행 제안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이렇게 떠나는 길은 어디라도 좋았다. 보김 씨가  알고 있는 유학생도 볼겸 영국 버밍햄으로 가는 길에 이스탄불을 들리자고 했다. 
영국에서는 셋이서 스코틀랜드까지 1주일 동안 차로 돌아 다녔다. 하루는 나 혼자서 계획에 없던 런던다녀왔다그야말로 발 가는 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 다녔다.
런던 고속버스 터미날에 내려서는 지도 한장을 들고 용감하게 빅토리아 거리로 나섰다. 소멸해가던 젊음이 살아 났다아무런 관광 명소도 찾아 보지 않고 곧장 테임즈강을 건너 ‘테이트' 뮤지움 향해 하염 없이 걸었다. 강변 헌책 노점 상에서 책들을 둘쳐 보고, 배고플 때에 친구가 싸준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아, 이런 곳이구나. 현대 미술의 높은 성곽이기도 한 ‘테이트 모던 진미는 잠깐 사이에도 충분히 전해진다. 이날 런던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고속 버스터미날로 돌아 가는 택시 안에서 내다 보이는 화려한 궁전을 운전수에게 물어 보니버킹검 팰러스.라고 했다.  빨간 모자를 군인들이 교대하는 장면을 보진 못했지만 이 또한 전리품이다.
어둑어둑해진 버밍햄에 와서는 아침과는 반대 방향으로 마을 버스를 타고 150년 된 하숙집으로 돌아 왔다.  친구가 특별히 만든 두툼한 햄과 라면 정식에 와인 까지 곁들인 성찬에 느슨이 피곤이 몰려 들었다.  
뉴욕으로 돌아 오는  남편에게 텍스트 메세지 보냈다. ‘뭐니 뭐니 해도 당신 덕이야.’ 
케네디 공항에서 웃는 얼굴로 반겨주는 남편과 동네 식당에서 가서 이거 먹을까 저거 먹을까…. 스트레스를 쌓는 일상을 기분 좋게 시작했다.
'가다가다가 지치면 다시 돌아 오리라. 웃는 얼굴로 반겨 주는 그대의 정든 품으로......' 노래 말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뮤지움 어브 이노선스

뮤지움 어브 이노선스

빠듯한 2박 3일 이스탄불 여정에 ‘뮤지움 어브 이노선스(Museum of Innocence)’를 포함시켰다. ‘뮤지움 어브 이노선스’ 는 말 그대로 뮤지움이기도 하지만 소설의 제목이다. 노벨상을 받은 터어키 작가 오르한 파묵은 자신이 쓴 소설에 나오는 온갖 생활 용품들을 모아 미술관을 만들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소설가 자신이 꾸며 낸 소설 뮤지움이다.
‘뮤지움  어브 이노선스’ 웹 싸이트에는 이 책을 갖고 오면 무료 입장이라고 했다. 짐을 덜어 볼까 계산해보니 책 값과 입장료가 비슷하다고 보김 씨가 급히 책 두권을 샀다. 그러나 여행 전에 이 책을 읽어볼 겨를이 없었다.

영행을 결정하고 얼마 후에 오르한 파묵이 쓴 '이스탄불'이라는 책을 샀다. 약속과 약속 사이의 남ㄴ는 시간에 들른 대학교 앞 작은 책방에서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이라는 책을 발견한건 우연의 일치였을까. 한번도 이스탄불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이스탄불 토박이인 세계적인 작가가 쓴  ‘이스탄불’이니 얼마나 잘 썼을까 했다.
'이스탄불'은 관광책자가 아니었다. 작가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삼춘 고모들과 함께 살던 4층 집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스탄불이 분위기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앞 부분에 할머니가 쓰던 방을 ‘뮤지움’같다고 한 부분이 있다. 그릇장이며 탁자위의 물건들이 남에게 보일려고 놓여져있다는 점을 간파한 오르한 파묵이었다.

‘뮤지움 어브 이노선스’가 저녁 8시까지 오픈을 했던 것은 행운이었다. 궁전과 신전과 몇 백년 된 거리들이 있는 올드 타운에서 보스포로스 강을 건너가니 이 곳은 서울의 강남과는 다르게 마치 명륜동이나 삼청동 같은 오래 된 부촌이었다. 좁다란 언덕 길에 다닥다닥 붙은 3, 4층 건물 중에 아무 특징도 없이 끼어 있는 ‘뮤지움 어브 이노선스’를 처음엔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어둠이 깔리는 골목길에서 엽서만한 간판이 겨우 눈에 띄였다.
우리는 책 뒷 장을 펼쳐 입장허가 도장을 받았다. 소설 주인공 남자의 실제 인물이 살던 집이라고 했다. 그와 그의 애인이 피운 담배 꽁초 수 천개가 마치 컨템포러리 아트처럼 뮤지움 1층 벽 한면을 채우고 있다. 립스틱이 묻어 있는 담배 꽁초가 아직 읽어보지 않은 처절한 사랑을 암시해주는 듯 했다.

층층 마다 1970년대 터어키 중산층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느 그릇장과 다를 바 없는 호마이카 그릇장 안에 찻잔, 접시, 핸드 빽, 안경, 인형, 시계, 낡은 사진과 신문 조각, 통조림 통, 포도주 병,구두와 여행가방, 부로치, 반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뮤지움에 전시될 물건들이 아니다. 소설의 장면에 맞추어 미니에츄어 가로등과 건물로 거리를 묘사해 놓기도 한 철저하고 꼼꼼한 작가의 손길이 구석 구석 배어 있었다.

이스탄불의 특미라는 애플 티(Apple Tea) 유리 잔은 여러 곳에 놓여 있다. 우리도 토카피 궁전 카페에서 애플 티를  맛 보았던 터라 오르한 파묵이 전시해 놓은 애플 티잔에 눈이 갔다. 아마도 남녀 주인공이 애플 티를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다.
한 젊은 여자가 층층마다 열심히 관찰하며 노트를 하고 있었다. 분명 문학도이다.

어서 빨리 이 소설을 읽어야 겠다. 아니 미리 소설을 읽었어야만 했을까? 그래야 작가가 철저하게 기획해 놓은  온갖 물건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소설의 세계로 빠져 들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나쁘지는 않다. 뒤 늦게 소설을 읽으면서 한 중년의 부자 남자와 가난한 젊은 여자의  연애 이야기의 장면장면이 생생하게 그려 질테니까. 어쩌면 애플 티를 예쁜 유리 잔에 따라 마시면 책 읽는 재미가 더하리라.
뮤지움 어브 이노선스를 나와 600년전에 세워졌다는 갈라타 타워로 갔다. 관망대에서 바라본 강 건너 올드 이스탄불의 성전 건물들은 관광객을 위해 오색찬란하게 밝혀져있었다.
'뮤지움 오브 이노선스'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이스탄불 거리를 거닐어 불 수 있으리라.






남편의 사진

서랍 속에서 두툼한 사진 더미가 나왔다. 결혼 초에 시어머니가 ‘에따, 네 신랑 사진이다.’며 주신 것이다. 눈에 콩꺼풀이 씌여 결혼을 했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거 큰일이다. 덩치가 큰 가구라도 맘에 안 들면 바꿀 수도 있을테지만, 사람은 어떻게 하랴. '했었다.
첫 눈에 반 해 몇 년을 두고 연애를 했다 해도  결혼하고 얼마 지나면 서로 실망과 절망을 느낄텐데, 중매로 만난지 두 달만에 결혼을 하고는 남편이란 사람이 낯 설기만 해서 난감하곤 했다. 우리는 죽이 잘 맞질 않았다. 남편이 좋아하는 걸 난 싫어했고 내가 하고 싶은 건 건 남편이 질색을 했다. 내가 어려운 만큼 남편은 또 오죽했으랴. 그러나 아이가 태어 나자 ‘가족’이라는 철통 같은 울타리를 쳐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사진 정리 조차 우리 집과는 달랐다. 친정 어머니는 내 아기 때 사진들을 까만색 세모난 테두리를 해서 앨범에 붙여 놓고 그 밑에 사진을 찍은 장소라든가 어머니의 감상을 꼭 한 두 마디 적어 넣으셨다. 시어머니가 주신 남편의 사진들은 ‘777 사진관’이라고 쓰여진 보스라질듯 얇은 봉투와 뿌옇게 된 비닐 봉지에 뭉터기로 들어 있었다. 거의가 흑백사진이고 몇개의 빛 바랜 칼러 사진이 있었다. 사진을 대충 둘쳐 보고 나서 그대로 어느 서랍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두 째가 태어나자 성격이 맞네 안 맞네 할 겨를도 없이 하루 24시간이 모자르게 살았다.
오랜 세월 후에 갑자기 튀어 나온 사진더미를 일단 다시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하루 날을 잡았다. 아이들도 집을 떠나 한가한 나날이다. 사진들을 바닥에 쭉 펼쳐 놓고 그 중 가장 어리게 보이는 얼굴부터 골라 앨범에 붙여나갔다.
이게 백일쯤 되겠나, 요건 좀 더 자란 얼굴인데, 어머 돌 사진이네.....하면서 똑 같아 보이는 얼굴 들을 비교하며 순서를 매겼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지며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진다. 밉기 만 남편이지만 애기 때는 너무 귀여웠다. 복실한 돐 사진 다음에는 좀 더 여문 애기 얼굴이 나타나고, 엄마 아빠랑 찍은 두 세살 짜리 어린이, 줄무니 쉐타를 입고 대청 마루에 앉은 수줍은 어린 소년의 표정이 아들과 똑 닮아 신기했다. 국민학생 얼굴 몇 장을 챙기고 나니 어느새 남편은 커다란 모자를 쓴 중학생으로 서서히 변신을 한다. 언뜻 언뜻 내 아들 녀석의 얼굴이 비치는 남편의 얼굴 표정에 정이 흠뻑 든다.
새카만 교복을 입은 단체 사진의  깨알 만한 얼굴들 사이에서 기어코 남편 얼굴을 찾 낸다. 동그랗던 얼굴이 길쭉하니 여드름 난 징그러운 청년이 된다. 소나무 밑 바위에 한 발을 얹은 멋쩍은 대학생 모습도 있다. 여자랑 찍은 사진은 없네. 시어머니가 빼 버리셨나. 시어머니가 한복 차림으로 미국으로 떠나던 날 공항에서 ROTC 복장으로 찍은 사진.  그리고는 미국와서 찍은 몇 장의 칼라 사진들이 있다. 남편이 입은 체크 무늬의 져지 바지를 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맞아 이런거 한 때 유행했지. 이 얼굴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본 그 얼굴과 똑 같구먼. 마치 한참 연애를 한 사이처럼 정다운 남편의 얼굴이다. 
어린 애기가 내 손 안에서 속성으로 어른이 되었다. 잠깐 타임 머쉰을 타고 다녀 온 것 같은데 어느 새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앨범을 덮을 때는 남편 어릴 때부터 한 평생을 같이 살아 온 것 같았다.
이래 저래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사이다.
퇴근 해서 들어 오는 남편에게 바빠서 저녁 준비를 못했으니 나가 먹자고 퉁명스럽게 말을 붙인다.

토마토 쳐트니

여행의 맛,토마토 쳐트니 (chutney)

토마토 쳐트니가 얼마전 다녀 온 영국 여행을 연장시키고 있다.
토마토 6개, 양파 3개, 사과 2개 그리고 빨간 피만 반 알을 자잘하게 썬다. 할라피뇨도 한개 잘게 다졌다. 티 백으로 사용하는 종이 봉지에 온 갖 향신료를 담는다. 겨자 씨, 코리앤더 씨드, 쿠민 씨드, 알스베리 같은 향료를 ㅡ티스푼 한개, 티스푼 반개 ㅡ 정확하게 양을 맞추고 개피와 생강, 베이 입사귀도 준비한다.
여행에서 돌아 오고 나서도 얼마 동안은 여행지를 다시 인터넷으로 찾아 보며 후속 여행의 맛을 본다. 그러나 정말  오래도록 느낄 수 있는 여행의 맛은 음식이다. 여행 중에 먹었던 음식을 집에 와서도 해 먹으며서 두고 두고 여행을  음미하는 것이다. 사연과 함께 말이다.
아주 오래 전, 비엔나에서 생음악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소세지와 사워크라우트를 푹푹 삶은 요리를 집에 와서도 한 동안 해 먹었다. 지금도 소세지 요리를 볼 때마다 88 올림픽 노래 '손에 손잡고'를 연주하던 비엔나 레스토랑이 떠오르며 생전 처음 가본 유럽에서의 기분을 느껴보곤 한다.
그 후 볼로냐에 갔을 때 200년 된 집에 살던 친구 동생이 만들어 줬던 '로즈메리 치킨'을 하도 만들어서 애들은 '엄마의 악명높은 로즈매리 치킨Mom's notorious rosemary chicken '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번 영국 여행에서 얻은 맛은 토마토 쳐트니다.  
스카트랜드 하이웨이를 달리면서 배가 출출하면 차 속에서 빵에 토마토 쳐트니를 바르고 치즈와 오이를 껴서 먹곤 했다. 성희 씨의 하숙집 주인 여자에게서 배운 영국식 샌드위치다. 
그러나 정작 내가 이 쳐트니에 반한 것은 혼자서 버스를 타고 런던에 갔을 때였다. 성희 씨가 아침 일찍 일어나 쳐트니를 바른 샌드위치를 싸줬다. 런던 고속 버스 터미날에 내려 지도를 보며 곧바로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뮤지움을 향해 걸었다. 그 유명한 건물들을 겉만 보며 걷다 보니 테임즈강이 빅 밴과 함께 눈 앞에 나타날 무렵 배가 고팠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 앞이었다. 비둘기가 땅 바닥에서 먹이를 쪼고 있는 노천 상점 앞에 앉았다. 두툼한 샌드위치를 꺼내 한 입 베어 문다. 
입안에 가득차는 샌드위치에 눈을 지긋이 감기며 ‘Ah~ ‘Heavenly’ 하는 영어가 저절로 나왔다. 달콤 매콤한 쳐트니가 단순한 행복을 맛 보게 해준 것이다.
아마도 나의 허기진 배와 수 백년 역사의 향기가 토마토 쳐트니 샌드위치의 맛을 '해븐리'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관광객을 붐비는 웨스트 민스터 사원 앞을 걸어가면서, 집에 가서 만들어야지,겸심을 한다.
영국 하숙집 아줌마의 토마토 쳐트니는 알고보니 그 옛날 인도에 가 있던 영국사람들이 인도의 전통 음식인 쳐트니를 영국식으로 개발 한 것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외국에서 먹은 음식을 돌아와서도 만들어 먹었다. 서서히 인도의 맛이 영국 입 맛으로 변형이 된 것이다.
''설탕은 꼭 브라운 슈거를 쓰세요. "성희 씨의 말을 따른다. 마른 크랜베리도 좀 넣었다. 커다란 냄비에서 부글부글 수 십가지의 향내를 뿜으며 끓어 걸쭉해진 쳐트니를 빵 조각에 찍어 맛을 보니, 바로 그 맛이다. 테임즈 강변에서 먹었던 그 맛이다. 아니 그 때 보다 더 짙은 향내가 풍기는 것이 바로 일품이다.
저 앞의 테임즈 강이 과연 현실인가 했던 그 때, 짙게 내리 깔린 흐린 하늘 그리고 마치 영화에서 처럼 종 소리 들리던 진짜 런던 거리가 쳐트니 맛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덩달아서, 느닷없이 가봤던 세익스피어 생가 앞 찻집에서 영국식 차 대신 마신 블랙 커피와 스코틀랜드의 체링크로스 룸엔드 브랙퍼스트 여관의 전통 영국식 찻잔으로 세팅이 되었던 아침 식사와 워즈워드가 살던 마을에서 아무 식당에나 찾아 들어가 늦은 저녁으로 먹은 피시 앤드 칩스. 
아아 벌써 그리운 맛이다.
내가 만든 토마토 쳐트니를 유리 병에 꼭 꼭 눌러 담으며 여행의 맛을 간직한다.

Tuesday, April 7, 2015

갈퀴 달과 뷔너스

갈퀴 달과 뷔너스


창으로 하늘이 들어 온다. 밤새 또 눈이 왔나. 고개를 들고 무심코 밖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짙은 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가늘게 얼키고 설킨 새 까만 나무가지들 사이에  가느다란 조각 달 하나와 빤짝하는 별 하나가 걸려 있다. 가슴이 뛰었다.
'아. 엄마가 말 하던게 저거구나. ' 벌떡 일어나 카메라를 찾았다.
철컥 철컥. 저 광경이 사라질까봐 빨리빨리 셔터를 누른다. 잠이 다 달아난 김에 내쳐 컴퓨터 앞에 앉아 어머니에게 이 메일을 썼다. ‘엄마, 이거지?  엄마가 말하던 그 달과 별,  맞지?’ 사진을 첨부한다.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바ㅡ로 저 갈퀴 달에다 에스코ㅡ트 하듯 같이 나타나는 금성 뷔너스. 나도  매일 새벽 5. 6시경 동쪽 하늘의 그들과 인사부터 한다요. 네 사진의 달, 내 일기장의 달과 꼭 같고."  
뭉클하다. '엄마는 그 달과 별을 일기장에 그렸구나.'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자주 들려 주던 이야기가 있다. 오빠들이 망원경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별을 바라 보는 것을 보던 어린 마음에 '저 별들이 떠 있는 하늘 너머는 뭘까 ? 또 그 하늘 다음엔 뭐가 있을까, 그 다음엔......' 생각하다가 무서워서 울었다는 이야기다. 
20년 넘게  혼자 사시는 엄마의 중요한 일과는 창 밖 내다보기다. 매일 아침 등교하는 아이들서 부터 건너편 아파트에 불이 켜질 때까지 바쁘게 오가는 바깥 세상 보기를 하신다. 세계의 도시라는 뉴욕 딸 집에 오셔서도 하루 종일 집에 갖혀 지내셨으니 결국은 또 창 밖 내다보기를 하셨다. 우리 집에서의 바깥 세상은 나무로 둘러 쌓인 앞 뒤 집 밖에 없다.
나와 잠시 얼굴이 마주치기만 하면  ‘해가 뜰 때는 저 뒷집 나무 사이에  빨간 점 하나로 시작 된다’라든가, ‘해뜨는 자리가 점점 북쪽으로 옮겨간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새벽부터 창 밖을 내다 보셨던 것이다. 조각 달과 금성이라는 말도 자주 들었지만 그저 응응 하곤 했었다.
요즈음 끄떡하면 창을 내다보는 나를 발견한다. ‘ 너도 내 나이 되어봐라.’ 하던 어머니의 말이 여기저기 맞아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하늘 쳐다보는 일까지 그 나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저녁에 차에서 내려 현관 까지 가는 짧은 시간에도 하늘을 올려다 본다. 집 앞 큰  나무를 가운데 두고 구름과 달과 별 들이 서서히 자리를 바꾸는 것을 바라본다. 유난히 밝은 북극성을 찾아 보고, W모양의 카시오페아와 별 세개로 허리 띠를 한 사각 형 오리온 좌를 찾느라 고개를 돌린다. 한 번은 플로리다에서 초 저녁 비행기를 탔는데  창 밖을 보니, 집에서 보던 것 보다 훨씬 더 커다란 오리온 좌가 검 푸른 바다 속으로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
눈섶 같은 초생달을 보고, 노을진 하늘에 홀로 빛나는 계명성도 본다. 점 같은 별 하나를 놓고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서서히 다이아몬드 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차가운 빛을 발하며 나에게 무슨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별 하나 나하나 별둘 나 둘….. 할 때의 그 별인가.  한 번 반짝한 저 빛이 몇 천만 광년이 걸려 내 눈에 들어 온 것이라고 했던가? 고대 사람들은 바로 저 별 을 보며 세상을 판단했다는 것이지.
태양계를 넘고 은하계를 넘어 그 다음으로 또 그 다음으로 한도 없이 뿌려져 있는 별 덩어리들을 생각하다가, 어머니 처럼 눈물이 날 뻔 한다. 
빅 뱅 이후 38만 년 쯤 지나서의 모습이라는 타원형 우주지도가 색맹 검사 챠트같았다. 이 세상의 생이 끝나면 가는 곳이 저 아름다운 그림 속 어디쯤 일까?
오늘 아침에도 문득 침대 머리 맡 창문을 내다 본다. '갈퀴 달과 그 달을 에스코트 하고 나온 새벽 별 뷔너스'가 있나 하고.  그러나 창 밖에는 해가 가득하다. 아직은 매일 새벽 그들과 인사를 한다는 엄마 나이는 아닌가 보다.

세탁소 아저씨와 대통령

대통령과 세탁소 아저씨

클린톤 대통령이 내 앞에서 양복을 입고 벗고 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좋은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 클린톤 부부, 언제까지 이 곳에 살 것인지?'라는 뉴욕 타임즈 기사 
에 실린 몇 개의 사진 중 하나에 내 시선이 멈추었다. 빌 클린톤과 나란히 선 한국인의사진이다.  사진 설명에는 클린톤이 다이어트로 살이 빠졌을 때 양복을 줄여 준  단골 세탁소에 걸린 사진이라고 했다. 클린톤 부부는 힐러리가 뉴욕 주 상원위원에 출마할 무렵에 우리 집에서 가까운 챠파쿠아라는 곳에 이사왔다.
뉴욕 세탁소의 대부분이 한국사람이 운영하고 있으니 미국의 대통령을 한 사람이 한국인 세탁소의 단골이라는 건 남의 일이 아니었다. 한국신문에 내고 싶었다. 그 세탁소에 전화를 했다.  ‘이게 뭐 기사꺼리가 되겠어요.’하는 세탁소 주인 정대웅 씨는 우연히도 예전에 같은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다. 미국사람들로부터는 ‘정, 이제 유명인사가 되었네’라는 인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전화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기사를 쓸 생각도 했지만,  별로 멀지 않은 그 세탁소를 한번 가 보고 싶었다.
약속한 날 세탁소에 가니, 바로 조금 전에 클린톤 집에서 옷 줄일 것이 있다고 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며 함께 가도 괜찮을 거라고 한다.  아니 이런 차림으로 어떻게 대통령 집에? 그러나 두 번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호젓한 길을 잠시 운전해 가니 평범한 한 저택에 다다렀다. 정문 옆 수위실에서 경비아저씨가 나왔다. 좀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나를 바느질 조수로 알았는지 운전 면허증 맞기라고 하고는 가만히 있는다. 곧 이어서 비서인 듯한 젊은 남자가 나와 우리를 맞는다. 정대웅 씨가 나를 같은 교회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자 여기도 무사통과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한 구석에 책 꽂이 앞에 앉아 있는 웬 늘수구레 한 아저씨의 뒷 모습이 보였다.  미처 빌 클린톤 대통령이라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하이” 하는 귀에 익은 쉰 목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덜컹했다. ‘에구. 저 사람이 클린톤이네’  라벤다 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빌 클린톤 대통령이란 말이지. 그는 책에서 얼굴을 들지 않은 채, 비서에게 옷들 다 준비했냐고 묻는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아 이상할 정도였다.
옆 방을 향해 가면서 나는 더 이상 내 신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실은, 나는 한국 신문 기자인데, 뉴욕타임즈 기사를 읽고 우리 한국 커뮤니티에 대통령의 단골 세탁소를 알리고 싶어서 함께 왔다.”고 이실직고 했다. 비서가 별 일 아니란 듯이 쉽게 오케이한다. 대통령도 내 말을 들었을텐데 아무 말 않는다.
양복이 가득 걸린 길다란 철봉같은 옷 거리 맨 끝의 옷 부터 하나씩 클린톤 대통령이 꺼내 입고 서있으면 정대웅 씨는 옷 깃을 접어 바늘을 꽂는다.  바지 차례가 되면 옆 방으로 가서 갈아 입고 나오곤 한다.  세탁소 아저씨가 내게 작게 속삭인다. “노선생님 때문에 저 방에 가서 입고 오는 거예요. 내 앞에서는 그냥 바지를 벗거든요.”
소매를 당기고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분필로 긋고 바늘을 꼽는 세탁소 아저씨에게 온 몸을 맞기고 선 빌 클린톤 대통령은 " 이 바지는 참 잘 맞았었는데, 이제 헐렁해졌다. 하긴 늙은 사람 바지들이 다 이렇지 않느냐." 술술 이야기를 한다.  
내가 서서히 질문을 꺼내자 대답도 술술이다.   ‘힐러리랑 오랜 만에 주말을 같이 보내게 되어서 오랜만에 강아지 데리고 이 근처로 하이킹을 할 것'이라면서, 다음 주엔 시카고로 갔다가 곧장 아프리카로 가는 스케쥴이 잡혀 있어서 멀리 안가는 것이 우리에겐 제일 좋은 베케이션이라고 근황을 말한다. 그리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웨체스터가 미국 내에서 가장 녹지가 많은 주택가라는 걸 아느냐.'는 대통령 다운 말도 한다.
몇 년 전 딸 챌시의 결혼식에 나타난 날씬해진 빌 클린톤의 모습에 세상이 다 놀란 적이 있었다. 건강문제도 있었지만 딸을 데리고 들어가는 날씬한 아버지 역할을 하고 싶어서, 그 좋아하던 정크 푸드를  멀리하며 24파운드를 뺐다고 했었다. 그러나 2010년도에 또 한번 심장 수술을 하고 나서는 철저하게 채식주의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또 옷을 줄이게 된 것이다.  
‘정은 항상 믿음직 해요. 들쑥 날쑥한 내 바쁜 시간을 다  맞추어주거든요.” 하는 미국 대통령과 시종 웃는 얼굴인 한국인 세탁소 아저씨라는 커다란 차이에 두꺼운 신뢰가 채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클린톤 부부가 이사와서는 비밀로 몇 군데를 세탁소를 다녀보고 정대웅 씨 가게를 정한 이유는 가장 약속시간을 잘 지켜서라고 한다. 
마지막 옷을 옷걸이에 걸었는데 대통령이 “잠깐만.”하더니  2층으로 올라가 베이지 색 양복을 들고 내려 온다.  “이거  1992년 뉴욕 전당대회 때 입은 것이지…...”감상에 젖는 표정이다. 이제는 다 끝났나 했더니, 아참참. 대통령은 또 후다닥 2층으로 올라 간다. 손에 바지 두어 개가 들려 있다. 갖고 있는 옷을 다 줄이는 것 같아서 물어 봤다. “옷이 안 맞으면 새 옷을 살 수있는 가장 정당한 핑계가 되는데요.” 대통령의 대답은 “우리는 경제 대공황을 지낸 가정에서 자라서 내핍생활이 몸에 베어 있습니다.”였다. 고치고 있는 옷 대부분이 선물 받은 것이라고 했다. 비서가 보여주는  양복 안 주머니에 수 놓아진 각 나라의 이름들이 다채롭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양복 몇개를 직접 들고 오랜 친구처럼 우리들을 현관까지 배웅을 하는 빌 클린톤 전 대통령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건강하세요.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한 내 말은 진심이었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친숙함을 갖게 하는 힘이 아마도 핸섬하고 마음 좋은 이웃집 키다리 아저씨같은 빌 클린톤의 카리스마가 인가 보다.
내가 쓴 기사는 나름대로 특종이 되었다. 나는 어쩌면 수 없이 옷을 벗고 입는 미국 대통령 앞에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눈 유일한 저널리스트일지도 모르겠다. 클린톤 대통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아이들에게도 보내고 한국의 친정 어머니에게 보냈다.  

콜롬버스와의 인연

콜럼버스의 자락을 슬쩍 만져 보았다. 콜롬버스의 동상이 뉴욕에 세워진지 120년이 해에 그와 함께 나의 60년 생일 지냈다.
애들이엄마 생일에 맨해튼에서 하나 구경하고 맛있는 저녁 먹자라고 했다. 그거야 보통 생일 때에도 정도는 했잖아. 이번에는 크게 잔치를 해야 되는거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요즘 세상에 절을 받기까지야 하겠으나, 바람과 파도를 거쳐 60 생일은 특별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기대가 채워 졌다. 높이 세워져 있는 콜럼버스를 만나 봤으니 아주 특별한 일이 것이다.
센트럴 파크가 시작되는 서쪽을 컬럼버스 서클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동상 때문이다. 50년을 뉴욕에 살았다는 뉴욕 시장 마이클 불름버그도 콜럼버스 동상을 올려다 적이 없다고 고백했고아마 대부분 뉴요커도 그랬으리라. 역시도 컬럼버스 서클을 없이 지나 다녔어도 가운데 우뚝 있는 동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딜가나 있는 많은 동상 중에 하나로 여겼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콜럼버스 동상에 새삼스럽게 눈을 돌리게 것이 일본 작가  다쮸 니시(Tatzu Nishi)컬럼버스를 발견하다(Discovering Columbus).라는 설치작품이다. 니시 씨는 콜럼버스 동상 주변으로 가설 리빙룸을 만들었다. 120년 동안 공중에 서서 바람을 맞아 온 콜럼버스 씨에게 처음으로 따스한 안식처가 생긴 것이다. 덕분에 홀로 외로웠던 그에게 사람들이 바글바글 찾아 들었다. 인터넷으로 표를 미리 구해놓고도 한참을 줄을 서서 기다리고 나서야, 가파른 가설 층계를 올라가 콜롬버스 씨의 리빙 안으로 들어 있었다
잡지가 놓여진 테이블과 소파와 텔레비젼 세트 평범하고 전형적인 미국식 거실이다. 다만,   가운데 거대한 콜럼버스 씨가 버티고 서있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기발함이다.
안에 이렇게 사람들이 들어차도 아랑 않고 곳을 바라보고 있는 컬럼버스 . “어딜 그렇게 보세요? 멀리 바다 끝 땅 덩어리가 보이십니까? “가까이서 보니 바위 얼굴처럼 거대한 콩크리트 얼굴에 뚫린 눈동자가 강열하다.    아메리카를  바라 보는 눈이다.    
그가 미국 땅에 발을 디딘 해는 1492, 거의 500 1982년에 나는 뉴욕 땅에 발을 디뎠다. 동상이 세워진 해는 1892, 60 후인 1952년에 태어난 내가 60 되는 생일에 콜럼버스 앞에 서있다기가막힌 인연이다.
생일이 컬럼버스 데이와 비슷했기에 아마도 뿐일 전시를 단 한번 뿐인 60생일 날에 맞추어 있었던 , 그리고 일본인 설치 작가가 나와 동갑이니 그도 환갑이라는 까지도 인연으로 묶어 보았다.
콜럼버스와 나의 하나 확실한 공통점은 그에게나 나에게나 아메리카는 설은 이국 땅이었다는 것이다.
콜럼버스의 리빙 룸에서 내려와 타임워너 빌딩 안의 이태리 식당에서 길 건너 컬럼버스 씨의 불켜진 방을 바라 보면서 식사를 했다. 환갑 상을 차려 놓고 자손들에게 절을 받은 보다 근사했다.  
이제 이상 콜럼버스는 회색빛 동상이 아니다. 나와는 옷자락을 스친 사이다.
그의 뚫는 듯한 동자를 다시 보지는 할지라도, 후로는 콜럼버스와는 무심할 없는 사이가 것이다. 이제는 콜럼버스 서클을 지날 때마다 일부러 고개를 들고 동상을 올려다 본다아직도 바다 끝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육지를 바라 보고 있는 컬럼버스 아저씨. 어디를 그렇게 계속 바라 보십니까
과연 콜럼버스가 없었더라도 내가 미국에 있었을까?  
하늘 높이 있는 그에게 웃음을 보낸다.


2011년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문인극 대본/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등장인물 :   앙드레 지드, 나레이터, 시인 1, 2, 3, 4, 5, 6 …가수, 무용수 장면 :   거리의 카페 …테이블, 의자, 가로등… 정원 ….꽃, 화분, 벤치  숲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