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 커튼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옷장 문에 얼기설기 그림을 그린다. 맑은 날 아침 나절, 밤색에 가까운 주홍 빛과 검은 회색의 어른거리는 무늬가 서서히 옆으로 움직이며 빛이 점점 희게 변하는 걸 알아챌 사이 없이 어느 새 없어진다. 지금, 창문을 때리는 빗 소리를 들으며 숙현이 보고 있는 것은 신기루인가.
숙현이 손잡이에 손을 대는 순간 찌릿한 것이 느껴진다. 손이 아니라 온몸이 찌릿했다. 아니 머릿 속 일것이다.
텅 비어있을 것을 알면서 문을 열려고 마음을 먹을 때 부터 숙현은 누군가가 옷장 안에 숨어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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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즈 리가, 머리 끝서부터 발끝까지 차려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글래디스가 약한 불에 올려있던 오트밀 냄비에 다시 불을 키고, 계란 흰자위 오믈렛을 미리 데워 놓은 접시에 담는다. 드리퍼에서 마지막 방울이 떨어진 커피 머그를 미시즈 리 자리에 놓을 때, 다른 커피 머그를 숙현이 들고가 미스터 리 앞에 놓는다.
미스터 리가 “아 냄새 좋군. 어때, 잘 되고 있나?” 한다. 답을 기다리는 질문은 아니다. “지금은 90년대 슬라이드를 작가별로…” 숙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시즈 리가 조용히 말을 한다. “미스터 파인스틴이 온다했어요. 같이 메트에 갈거니까, 미스터 김이랑 먼저 들어오세요.”
드라이브웨이를 빠져 나가는 차를 바라보고 나서, 숙현은 팬에 남아있는 오믈렛을 접시에 담고 글래디스가 포코레이트에 끓여놓은 커피를 따라, 싱크가 달린 아일랜드에 앉아 급히 먹는다. 숙현이 부엌을 나서기도 전에 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글래디스의 콧노래가 들린다. 멀리서 잔디 깍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딴 방을 쓴다는 걸 안 것은 숙희가 오고 나서 며칠 후다.
운전수 미스터 김이 양 손에 두 세개씩 든 샤핑 백을 2층으로 올려다 놓고 내려오자, 미시즈 리가 층계 위에서 “숙현, 나좀 도와줄래?’ 한다. 방으로 들어 선 숙현은 숨이 멎는듯 했다. 한 쪽 벽을 다 차지하고 있는 그림은 - 소매에 주름이 넓게 잡힌 흰 블라우스를 입은 중세의 젊은 남자가 벽난로 옆에 서있는 - 에드와드 앙드레이 초상이 아닌가? 저 그림이 진짜라면 수 백만 달러 일텐데. 웬지 작아보이는 침대가 하나 덜렁 놓여있을 뿐 넓은 침실 어느 벽에도 그림 한점이 안 걸려있다.
그리고 어디에도 남편 미스터 리의 흔적은 없다.
미시즈 리가 샤핑 백에서 옷을 꺼내며 “이것들을 옷장에다 좀 걸어줄래?”한다. 글래디스가 내일 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옷장 안은 마치 일부러 만들어놓은 설치 미술작품 같다. 높은 천정에서 부터 바닥까지 가득찬 옷이 - 거대한 페이브릭 칼러 샘플 북처럼 - 자로 잰듯한 선을 이루며, 숙현이 끼어들 빈틈을 주지 않는다.
‘엄마가 이 아줌마와 정말 친한 사이일까?’ 건네주는 옷을 하나 씩 걸을 때 미시즈리가 무슨 말인가 하는 것 같았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미안하다라는 소리겠지했다.
미시즈 리가 옅은 스카이 블루 스카프를 탁탁 털어 반듯하게 접고는 “가만있자. 아, 저기 유리 서랍 보이지. 블루 칼라 쪽 맨위에 놓아요.”
방에 돌아온 숙현은 잠을 이룰수가 없다. 옷장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자로 재듯 반듯 반듯 천천히 이루어지는 아침 식사 시간이 끝나고 그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방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안으로 들어가자 풍기는 은은한 향기에 가슴이 둥둥 거렸다.
옷장 손잡이를 잡고 양쪽으로 밀자 너무 쉽게 열리는 바람에 또 가슴이 둥둥거린다.
흰색에서 회색과 검정색, 그리고 울긋불긋한 옷의 색들이 조화를 이루며 길이 순서대로 걸려있다. 양쪽 벽 선반 위에는 핸드백들이 색과 사이즈 별로 일목요연하고 바닥에는 구두들이 한 줄로 나란하다.
옷을 하나 꺼내어 가슴에 대고는 거울을 바라본다. 옷걸이를 잡아 꺼낼때 마다 그 옆의 옷에 닿지 않도록 완전한 슬로우 모션이다. 핸드 백을 들고 그 자리에 잘게 자른 마스킹 테이프를 살짝 붙인다. 어깨에 메어보고는 제자리에 다시 놓을 때 테이프를 뜯어낸다.
숨을 멈춘채 사르르르 미끄러지는 옷장문을 닫고 살살 방문을 나설때 숙희는 이마를 만진다. 땀이 난 것 같아서이다.
미스터 리의 방 쪽을 힐끗 바라다보면서 층계를 내려 올때, 윙윙 베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었던것 같은데 집안은 조용하다.
‘수키, 겟 유어 런드리즈.” 글래디스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숙현의 방으로 뛰어가는데, 주머니 속에서 전화가 울린다. 몇시지? 엄마가 아직도 안 자네.
“엄마, 왜?” 한손으로 침대 위의 쌓아두었던 옷을 잡는다.
“아니야. 두 분 다 나가셨어. 아줌마가 얼마나 잘 해준다고. 엄마한테 하는 것 처럼 한다니까. 알았어. 응. 그래 그렇다니까….”
플라스틱 통에 빨래감을 던져 넣으며 “ 응. 엄마. 걱정마. 잘 할께. 알았어. 응, 안녕.”
전화가 끊어지는 걸 확인한다. 글래디스가 빨래 통을 들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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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이, 걔네 아주 부자야. 부자니까 당연히 너한테 잘 해준다고 생각말고 열심히 일을 잘 해야 한다.”
숙현은 미시즈 리가 엄마와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을 다니며 같은 서클 활동을 하며 아주 친했다는 것, 미시즈 리가 대학 3학년때 미국으로 유학 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 굉장히 고급스런 화랑을 경영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엄마가 말 할때에 숙현은 멀리 보이던 별이 가깝게 보이는 것 같았다. 뉴욕 아트 세계가 꿈이었다. 꿈이 손에 닿는다.
“ 그집 아저씨는?”
“ 어, 이진수 씨. 무슨 사업을 한다고. 듣고도 잘 모르겠네. 아 델리? 하여간 그런걸 여러개 갖고 있다던데….”
미스터 리가 “넌 정말 네 엄마 젊었을 때 모습을 그대로다.”했을 때에야 미스터 리도 엄마와 대학 동창생이라는 걸 알았다. 사실 정숙이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숙현이 뉴욕으로 가겠다고 하고 나서야 말해주었다. 아 참, 뉴욕에 내 동창있어. 라고.
숙현은 엄마가 왜 미시즈 리 이야기를 안했는지 알것 같았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딸을 위해선 뭐라도 하는 엄마라고 다시 마음에 새긴다.
숙현은 엄마에게 미스터 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엄마도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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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난다더니'
미라 언니가 ‘와아’ 소리를 지르자 영자 아줌마가 울먹이며 한 소리다.
숙현이 문을 열자마자 큰소리로 “엄마”하며 가게 뒤쪽으로 곧장 걸어오는 걸 본 엄마는 짐짓 고개를 숙이며 뭔가를 찾는 척 했었다. 엄마 눈앞에 입학허가서를 디민다. 언니들 나 예일합격이야. 뒤 쪽에서 커다란 양동이를 든 박씨 아저씨까지 후루루 나온다.
입학원서를 냈다고 하니까 ‘그래 떨어져도 실망은 말아라. 예일대학이 왜 예일대학이겠냐. 대학원은 더 들어가기가 어려운거 아니야?’라던 엄마다. 일하는 언니들과 손님들이 왁자지껄 하는 걸 들으며 엄마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묵묵하다. 남들은 겸손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엄마. 나, 친구들 만나. 먼저 밥 먹어.” 숙현은 떠들석한 ‘파라다이스 미용실’ 문을 나선다.
화가는 배가 고파.
아냐 엄마 그건 옛날 말이야.
아니다. 지금도 그림 그린다면서 밥 잘 먹고 사는 사람 봤어?
물론… 엄마 처음엔 다 고생하지, 그렇지만. 요즘 얼마나 화가들이 잘 사는 지 알아?
숙현의 기억 속에는 남아있지 않는 아버지도 화가였다는 건 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그림들은 다 태워버렸다고 했다. 숙현은 활활 불타는 아버지의 그림을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빈 종이에 불타는 아버지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별이 흩어진 밤 하늘이기도 하고, 앙상한 나무이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풀잎이기도 하다. 어떨땐 까만 색 긴머리 여자의 옆 모습이나, 어깨가 넓은 남자의 뒷 모습이다.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의 가장자리 또는 캔버스 전체가 불에 휩싸여 있는 그림이다. 학교에서는 숙현이 미대로 진학할줄로 알고 있었다.
숙현은 인하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했다. 그림 안 그린다고 약속했지만 미술이라는 말이 들어있다는 것 때문에 숙현은 늘 엄마 앞에 조마조마한 자신을 발견한다.
엄마는 숙현이 서울로 간다고 할까봐, ‘거긴 너무나 경쟁이 심한곳 아니니, 여기선 조금만 잘 해도 크게 보이는데…’서울도 못가게 했었다. 숙현에게 엄마는 우주였다. 아니 차가운 태양이었다. 엄마를 뺑뺑 돌며 인천 시립 박물관에서 일하던 숙현은 이제는 엄마와 타협하지 않기로 입술을 꼭 깨문다. 미국으로 갈꺼야.
“우리 애가 너의 화랑에서 일좀 할수 없을까” 했을 때 미시즈 리는 “어쩌면 이렇게 타이밍이 맞을 수가.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찾고 있었어. 오래된 자료를 정리하는 건데,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었거든. 우리 집에서 해야 할 일이라서.” 했다.
“이 일이 끝나도 우리 집에서 학교 다녀도 되. 여기 두 사람 뿐이니까.” 했다고 엄마가 좋아했을 때 ‘왜 내가 엄마 친구 집에서 학교를 다녀.’ 숙현은 엄마가 커네티컷이면 다 커네티컷인줄 아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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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현이 처음 엄마 친구 집에 도착 하던 날, 까만색 티셔츠에 하얀 앞치마를 한 40대로 보이는 스페니시 아줌마 글래디스가 현관문을 열고 숙현이 들어서도록 손잡이를 잡고 서있었다. 대리석이 깔린 현관에 곧장 이어진 층계 참에 천정을 찌르고 있는 스테인리스 조각 작품이 마치 어느 잡지 사진 안에 들어 온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층계로 남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하이, 미스터 리. “ 글래디스가 깍듯이 인사를 한다.
회색 머리 회색 옷의 미스터 리가 영화 속에서 튀어 나온 것만 같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박..숙현?”
“네, 저.”
“와이프가 늦는다고 연락이 왔어요. 아,아, 미스터 김 수고했어. 가방 저쪽 끝 방으로.”
운전기사가 가방을 들자, “미스터 김 집안 안내를 좀 해주지. 아! 숙현학생, 저녁은?” 한다.
“네 비행기에서 뭘 많이 먹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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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공항, 조용히 웅성거리는 군중 속에서 ‘박 숙 현’이라고 한글로 쓴 작은 종이를 들고 서 있던 남자를 보고는 애인이나 만난듯 했다. 밀리는 287이라고 쓴 하이웨이에 차가 한 없이 서있는 듯 할때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숙현을 보며, 목을 가다듬는다.
“뉴욕은 처음인가요. 아니 커테티컷이요.” 한다.
짧게 “네” 하고는 숙현이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 봤고, 기사 아저씨도 아무 말도 않았다.
숙현은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어떻게 개학 할때까지 몇 달을 엄마 친구 집에서 살지? 전혀 모르는 나이든 사람들이랑 어떻게 지내나. 마치 동생을 만난듯 반가와하며, 짐을 뺏어 끌고 가면서 계속 뒤돌아보며 숙현이 잘 따라오는가를 챙기며, 차 뒷 문도 열어주고 뒷 자리에 탈 때까지 기다려 문을 닫아준 친절한 기사 아저씨 뒷 머리에, 왠지 마음이 간다.
글래디스가 식탁에 놓인 뚜껑 덮힌 접시를 숙현에게 손으로 가리키고는 앞치마를 벗어 접는다. 미스터리는 “그럼. 푹 쉬어요.” 층계를 올라간다.
숙현이 미스터 리를 쳐다보고 있는 걸 아는지 미스터 리가 층계 중간에 멈춰서서 뒤를 보며 고개를 끄덕한다. 숙현은 뚜껑을 열어보고 햄과 치즈가 끼어있는 작게 썬 얇은 샌드위치 접시를 들고 미스터 김이 간 쪽으로 걸어간다.
“저 2층에는 두 분 침실이 있구요. 아랫층엔 화장실이, 여기 하나” 그리고 복도를 지나 문을 열며 “여기도 ….” 까만색 스트라이프 벽지 화장실 세면대 위에 하얀 백합 다발이 꽂혀 있다. 미스터 김은 숙현이 신기해하는지를 살펴본다.
“네 고마와요. 정말로 수고 많으셨어요.”
“그럼 푹 쉬도록 하세요.” 미스터 김이 나가자 숙현은 가방을 바닥에 눕히고 지퍼를 열기 전에 방안을 둘러본다.
다음 날 아침, 부엌 식탁에서 미시즈 리에게서 받은 차가운 느낌은 아마도 하얀 블라우스와 까만색 커다란 구슬 목걸이 때문이었을까. 앵두만한 진주 귀걸이가 오만하고 냉정하다.
공항 식당에서 허겁지겁 비빔냉면을 먹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주름진, 그러나….. 촛불처럼 파르르 흔들리는 동그란 눈과 도톰한 입술, 손으로 살살 빚은 듯한 콧망울. 아름다운 얼굴이다.
“어머니가 아주머니 드리라고 김치를 보내셨어요.” 하자 미시즈 리가 당혹한 얼굴을 한다는 걸 눈치 챈 숙현이 “엄마가 밭에서 오개닉으로 키운 갓으로 만든거라고...”하면서 냉장고쪽으로 움직이는데, 미시즈 리가 덜컥 높은 목소리로 말한다. “꺼내지 말아요. 무거운 걸 들고 왔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미시즈 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낸다.
“그래, 여행은 괜찮았어요? 식사하고 나서, 지하실 스튜디오로 내려와요.”
아무도 없는 집안, 숙현은 지하실 방에서 사진과 그림과 책과 씨름을 한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서있는 숙현의 눈 높이까지 책과 종이와 작은 박스들이 쌓여있었다. 지금은 많이 낮아졌다. 오늘 저녁에는 두 부부가 다 일이 있다는 말을 기억하며 기지개를 켠다. 영원이 여기서 살면 좋겠다.
58가 화랑에 갔었다. 노란색 머리를 뒤로 묶은 새파란 눈의 갤러리 남자 직원이 호들갑스럽게 다정하다. 버그도프 굿맨 레스토랑에서 함께 점심을 한 미시즈 리는 숙현에게 미스터 김이랑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맨해튼에서 커네티컷 그리니치까지 두 시간 넘는 드라이브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티스트인가요?
아니요. 아트의 역사를 공부해요.
그럼 갤러리에서 일할껀가요?’
몰라요. 아직은. 대학원 마치고 봐야지요. 미스터 김께서는 아트에 관심이 있으세요?
저, 그림 그립니다.
네? 그러세요? 어머나 언제…. 어떤 그림을요? 유화?.
시간이 될 때마다 손바닥만한 작은 스케치북에, 볼펜으로 그려요.
어머나. 미술 공부하셨어요?
고등학교 때 이민왔어요. 고모네 야채가게에서 일하면서 퀸즈 커뮤니티 대학을 다니다가………..
“그림 한번 보고 싶네요.”
“기회가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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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손님 초대가 있는 날이 아니면 부부가 함께 저녁을 하는 날은 드믈다. 미시즈 리가 늦는 편이라 숙현은 미스터 리와 저녁 식사를 하곤 했다. 글래디스가 준비해 놓은 식사를 차리는 건 숙현이다. 냅킨을 깔고 숫가락을 놓을 때 미스터 리가 거든다. 둘이 마주 앉는다. 반 백의 머리를 뒤로 넘긴 미스터 리는, 잃어버린 젊음을 찾아 나선 듯, 대학시절 이야기에 몰두하다가 어느 순간엔 마치 젊음을 찾은 것 처럼 숙현을 뚜러지게 바라보곤 한다.
그 옛날 나의 엄마를 생각하는 걸까?
식사 시간이 늘어진다. 어느 새 글래디스가 퇴근을 한 모양이다. 보통은 설거질을 해놓고 집에 가는데. 슬쩍 사라졌다.
접시를 치우는 숙현을 거들다가 숙현의 몸에 부딪치자 미스터 리가 흠칫하고는 어색하게 허허 웃는다. 갑자기 두 손으로 숙현의 두 팔을 잡는다.
부부가 다 밖에서 저녁을 한다는 날, 운전수 미스터 김이 두개의 커다란 박스를 들고 들어온다. ‘사모님이 숙현씨 방에 갖다 놓으라고 했어요.’
미스터 김이 숙현 방에 들어오기는 첫 날 이후 처음이다. 책상위의 가지런한 카타로그 파일과 서류들을 둘쳐본다.
“ 사모님이 20년 전에 벌써 외국작가 전시를 하셨네.”
“ 미스터 김 그림을 사모님에게 한번 보이지 그러세요.”
“ 에이 뭘”
“ 와이 낫?”
미스터 김이 방을 나갔다가 와인병과 잔 두개를 들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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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별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을 들었을때, 숙희가 처음 생각한 것은, 그럼 죽으면 다시 별로 돌아가나? 였다. 여기서 말하는 별은, 빅 뱅 때 만들어진 원자보다 작은 요소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가상이겠지만, 숙희는 오래 전 설악산에 올라갔을 때 본, 칠흑같은 하늘에 촘촘히 흩 뿌려진 별도 아니고, 언젠가 속초 암흑같은 바다 위에 떠있던 주먹만한 별도 아닌, 지금 창문 밖 그 별을 생각한다.
마치 방안을 드려다 보는 것 같은 별이 숙희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깜빡하는 것 같았다.
저 별 말이다. 저별에 아버지가 계실까? 자기 목숨을 끊은 사람이 별에 못 간다고 해도 아버지는 가셨을거야. 별 그림을 많이 그리셨다잖아. 나도 갈수 있을까, 아니 지금 갈수 있을까.
침대가 흔들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새벽까지 그 별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손이 숙현이 허리에 와 닿는다. 따듯하다. 시계가 새빨간 빛으로 2시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불을 둘치며 일어서려는 숙현의 허리를 다시 감싸는 손. 따듯한 손. 숙현이 허리에 감긴 손을 잡으며 돌아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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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으로 미시즈 리가 차에 탈 때까지우산을 받치고 서있는 미스터 김이 보인다.
차가 미끄러지듯 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 숙현은 아침 커피를 끝낸다.
향내나는 방에 들어가 조심조심 화사한 옷가지를 꺼내어 얼굴에 대어 보는 절차를 지켜야한다. 자기 모습에 감탄을 하는 그 차례를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해야만 앞으로 당당하게 잘 살아갈수 있다. 나는 언젠가는 정말로 내 옷을 입을 자격이 있다.
떨어질 듯 줄타기 밤을 지낸 아침이면 더욱 더 이 의식이 필요하다.
그렇게나 별이 빛나던 밤인데 오늘은 이렇게나 비가 오네.
그림자를 본것 같은데. 왠일인지 옷장문 손잡이를 쥔채 한참이나 망설인다. 숙현은 하얀 옷장 문을 연다. 쭈루룩. 한발짝 들어선다. 언제나 처럼 황홀하다.
“숙현아”
몸이 굳었다.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여인이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한 전설은 사실에 근거했었던 것 같다. 숙현은 똑 바로 서있는다. 영원의 시간이 흐른 뒤, ‘숙현아’ 부른 사람이 다시 ‘숙현아’ 한다. 굳어있던 숙현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무릎이 맥없이 꺾인 것이다.
나즈막한 절규의 소리가 들린다.
“ 나는 네 엄마에게 사죄할 기회가 생긴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었어.”
미지스 리의 첫 마디를,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있는 숙현은 듣지 못하는 것 같다.
“ 이진수가 네 엄마와 나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는 걸, 내가 확 끌어당긴거였지. 끌려올수 밖에 없지. 미국에 아파트와 비지네스까지 다 마련해 놓았으니 같이 가자고 했거든. 정권이 바뀌면 다 뺏길 우리집의 재산이었어. “ 목소리가 높아진다.
“진수네 집이 가난했거든 찢어지게. 온 몸으로 자기를 사랑한 혜주를 돈과 바꾼거야.” 웃는 소리가 들린듯 하다.
“우리가 미국가서 결혼한다니까 아랫배를 가리며 백지장이 된 너의 엄마, 그 얼굴 이제 나 잊어 버릴꺼야. 잊을 수 있어. 이제 안 미안해.”
미시즈리가 오열한다. “나쁜 자식, 비겁한 놈.”
“컴언 미시즈 리, 나우. 유 고.” 처음서 부터 그 옆에 서 었었던 글래디스다.
숙현을 일으켜 세우며 글래디스가 속삭인다.
“ 아이 노 디스 클로젯 라이크 아이 노 마이셀프. 아이 노우, 하우 매니 와인 바틀스 인 디스 하우스. 유 노우?” 숙현 귀에 더욱 바짝 대고 한마디를 더한다.
“아이 노우 에브리씽!”
숙현을 붙 잡고 층계를 다 내려온 후 글래디스가 크게 “오케이. 수키, 기브 미 유얼 런드리즈.”한다.
숙현은 고개를 흔들며 허공을 걷듯이 방으로 간다.
전화가 울린다.
“숙현아. 숙현아.”
“으응… “
엄마의 목소리가 아주 밝다.
“정숙이가 전화를 다 하네. 네가 일을 벌써 다 끝내고 아주 잘 했다고, 만족한다고.”
“아, 으응.”
“그래서 더 이상 네가 자기 집에 있을 필요 없구, 학교까지 멀어서, 예일 대학 앞에 너 있을 아파트를 계약했다는 거야. ”
“응.”
“그런데 숙현아. 저, 으음, 이진수 아저씨는 어때? 너에게 잘 해주시던?” 엄마 목소리가 떨린다.
“으응”
“많이 늙으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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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현이 부엌으로 갔을 때 빨간 원피스를 입은 미시즈 리가 자리에 앉아있다.
포크와 나이프로 접시를 뒤적이며, “이따가 운전수 미스터 김이 너를 기차역에 데려다 줄꺼야.”
“ 아, 그리고… 아저씨가 아파트에 가 있을거다.” 하고는 소시지 조각이 꽂힌 포크를 입에 가져간다.
미스터 리 자리는 비어있다.
숙현의 머리 속에서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활활 타들어가고 있는 캔버스. 한번도 본 적도 만져 본적도 없는 아버지가 그 캔버스 안에 있다. 얼굴은 미스터 리.이진수. 회색 머리에 회색 스웨터. 다정한 눈빛과 따스한 손.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메아리쳐 들린다.
미시즈 리가 일어나 나간다. 창 밖으로 기다란 리무진 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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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차 뒷문을 열어준 미스터 김이 숙현이 뒷 자석에 앉자마자 문을 닫는다. 차가 집을 빠져 나와 한참을 가도록 둘은 말이 없다.
기차 역에서 차가 멈추고, 미스터 김이 내려서 차문을 열어 주고, 뒤로가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 땅에 놓고는 한참 숙현을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걸어가 운전석에 탄다.
시동 걸린채 머뭇하던 차가 움직인다.
숙현은 가방을 끌고 대합실로 향한다.
(2022-1, 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