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용을 처음 만났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그가 자기 이름을 말하면서 더듬거렸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던 그의 차를 타고 갔다. 그의 짐이 많았으니까.
까만색 가죽 케이스가 가장 큰 덩어리이고, 웬만한 1박 2일 여행 백 크기의 쑥 색 캔버스 가방과 우산같이 생긴 길다란 기구에다가 둘둘 감긴 두꺼운 전기 줄 뭉치가 하나 더 있다.
내 핸드 백 속에는 수첩과 팬이 들어있을 뿐이다.
소호
첫 작업은 맨해튼에서 였다. 서브 웨이 프린스 스트리트 역에서 거리로 올라서면 이름 붙일수 없는 맨해튼 냄새가 덥 친다. 슬쩍 스치는 향수냄새와 뭔가 가 썩는 깊숙한 냄새 그리고 차이나 타운에서부터 풍겨오는 지글거리는 기름냄새다. 프라다 매점 앞에는 프라다, 샤넬, 구찌를 파는 노점상 아저씨가 젓가락으로 느긋하게 중국음식을 퍼먹고 있다.
꽉 들어찬 차들은 파란 신호등에도 움직이지를 않고, 양쪽 인도에는 서로 어깨를 부딪치는 인파가 밀물 썰물이 섞이듯 한다. 소매가 없는 꽃무늬 셔츠에 무릎까지 오는 까만색 부츠를 신은 여자의 노란색 머리카락이 춤결같은 몸 동작에 맞추어 출렁인다.
소호를 의식하고 갖은 멋을 다 부리고 나왔지만 이 거리에서는 맥을 못 춘다. 누군가가 “한국 분이세요?” 다가올 것 같은 영락없는 한국 아줌마다.
가로수 잎사귀조차 하나씩 색을 칠 해 붙인 듯한, 갤러리가 들어찬 머서(Mercer) 스트리트는 서브 웨이 역 바로 옆 그린(Green) 스트리트로 한 블록 걸어가면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하우스튼 스트리트를 향해 걸어가다가 121이라는 작은 숫자가 붙어있는 회색빌딩을 발견하고는 두리번거렸다. 좀 있다가 어깨엔 큰 가방을 메고 양손에 작은 가방을 들고, 겨드랑이에는 길다란 우산이 끼고 걸어오는 그가 보인다. 뛰어가서 뭐든 들어주려고 하자, 괜찮습니다 하는 그는, 두 번 째 만남인데도 첫 번과 마찬가지로 내 얼굴을 잘 쳐다보질 않는다.
한국 잡지사에서 그를 소개했다. 나의 대학 동창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한 그에게 대학 후배인 잡지사 사장이 내 전화번호를 준 것이다. 즉 뉴욕에 있는 갤러리 전속작가를 인터뷰할 나에게 사진을 찍을 사진작가를 소개한 것이다.
구내전화를 받자마자 후닥닥 층계를 내려가는데 리셉션 데스크 앞에 한 남자가 보인다. 곱슬한 머리에 마른 듯한 남자다. 내가 안녕하세요 하자,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아, 저.... 저, 바, 박. 요....음… 박, 일용입니다.” 한다.
망신을 하려면 자기 아버지 이름자도 안 나온다는 말은 있지만 자기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왜? 이렇게 이쁜 여자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혹시 한국에서 들었을 나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었을수 있다.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단발머리에 까만색 테두리 안경을 쓴, 혹은 빨간색 립스틱을 한, 그리고 손에는 막 쓰고 있던 팬을 놓을 틈새 없어 들고 있을 그런 여자와 너무 달라서? 헐렁한 티셔츠 차림이 너무 평범해서? 어쨋든, 예술가 답게 첫 대면을 하려던 의도가 빗나가서 당황한 것은 분명하다.
신문사 카페테리아에서 동려들에게 그를 사진작가라고 소개했고 우리는 정식으로 약력을 주고 받았다. 나보다 먼저 뉴욕에 왔고, 롱 아일랜드에서 살고, 36가에 스튜디오가 있고, 여섯 살 네 살 아들 둘이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그의 개인전 이야기 그리고 이번에 같이 할일에 대한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면서 나는 속으로는 자꾸 웃었다. 아니 자기 이름을 더듬다니.
새빨간 무나물과 버섯무침과 시금치나물 위에 계란 후라이가 얹힌 비빔밥을 먹으면서도 그는 나를 잘 쳐다보질 않았다.
그가 짐을 건물 앞에 내려 놓기도 전에 나는 #3 초인종을 눌렀다. 삐익 열린 문을 잡고 서있는 동안 그는 짐을 좁은 현관 안으로 들여 놓았고, 내가 먼저 층계를 올라가 문 앞에 나와있는 집 주인과 인사를 하는 동안 그는 가파로운 층계를 한칸씩 두번에 거쳐 올라왔다.
등받이 높은 의자가 한 열개쯤 바짝 땡겨져 놓여있는 길다란 나무 테이블과 유리로 된 나즈막한 커피 테이블 하나 그 이외의 가구는 안 보인다. 벽에는 그림 한점이 없다. 절간 같은 로프트가 갑자기 어수선 해진다. 자연스레 보이지만 실은 철저하게 기획된 흐트러짐으로 몇권의 잡지가 놓여진 테이블 옆에 짐을 푼다. 내가 그를 도와주는 사이, 영화라도 찍을 듯한 장비를 본 집 주인 화가는 어느 새 셔츠를 갈아입고 나타났다.
그가 꺼낸 카메라가 ‘핫셀블라드Hasselblad’다. ‘이런 카메라 알기나 해요?’ 가 아니고, ‘물론 이건 알고 있겠지?’하는 얼굴. ‘모르는데요’하면 ‘아니 이걸 몰라?’ 놀라는 그런 얼굴로, 카메라를 신주단지처럼 테이블위에 살살 놓는다. 나는 그 하셀블라드를 잘 알고 있다.
내가 23살 때, 그러니까 20년전이다. 한 남자가 바로 이 핫셀블라드 카메라를 들고 “미쓰 노. 이거 얼마짜린 줄 알아?”하며 내게 다가 왔다. 캐논 올림푸스 나이콘 정도는 알았지만, 핫셀블라드라는 카메라는 몰랐었다. 진부령 스키장에서그 남자가 찍어준 사진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하얀 눈을 배경으로 나는 푸른 보라색 자켓을 입고 있다. 3 X 4 사진 속의 내 얼굴. 팽팽하다 못해 터질듯한 뺨이 빨갛다. 눈 바람 때문이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웃을 수 없다는 듯 활짝 웃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난 핫셀블라드가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다. 만날수록 거리는 더 가까워 졌다. 하지만 나를 바라볼 때에 그 동그란 눈이 깜빡 깜빡하는 걸로 바뀌었을 뿐, 그는 끝까지 나를 똑 바로 바라보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끝까지라는 것이 한 20년 세월이 지난 후, 그를 다시 한국에서 잠시 만났을 때까지다. 애매모호했던 에피소드들을 다 모으면 답이 나오려나.
소호에서의 특집기사를 잡지사에서 좋아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진을 썼다. 창문의 그림자가 길게 비치고 있는 반짝이는 마루바닥이며, 커피 테이블에 놓인 ‘아키텍츄어’잡지 표지의 극히 작은 한부분의 클로즈 업이, 집안에 자기 그림하나 걸어놓지 않은 화가의 감춰진 라이프 한 구석을 돋보기로 들여다 보는듯 했다.
박용일과 나를 콤비로 잡지사 일이 줄지어 들어왔다.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식당의 오더블 담당 한국여자, 차이나타운 끄트머리 코딱지만한 스튜디오에서 그림그리는 막 떠오르는 화가. 거리에서 줏은 물건으로 작업을 하는 부르클린의 설치미술가.잘 나가다다 한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가수 양희은까지.
맨해튼에서 작업이 끝나면, 수 십개의 필름통을 들고 사진 현상소에 같이 간다. 두어시간이면 필름이 나온다. 두어시간을 ‘딘 앤드 델루카’ 같은 왁자지껄한 카페에서 얼굴을 가까이 하고 서로의 약력을 조금 씩 더 파고 들어가곤 했다.
한번은 32가 설렁탕 집에 갔을 때 그가 웨이트레스한테, “미원빼고 해주세요.”하고는 ‘우리집이 식당을 하기 땜에 잘알아요.’했다.
식당하는 집 아들이구나. 무슨 식당? 물어보질 못했다.
현상소로 가서 수백개의 길다란 필림 중에서 몇 개를 가위로 쑥딱 잘라 나에게 건내준다. 나는 집에 와서 사진 박스 위에 네가티브 그림을 올려놓고 빛과 그림자를 뒤집어 상상하면서 질문에 열심히 답을 해준 주인공의 느낌을 찾아 낸다.
사진 현상소를 같이 갈수 없을 때는 그가 따로 잡지사로 필름을 보낸다. 하지만 그가 찍고자 하는 장면을 미리 폴라로이드로 찍을 때 나도 옆에서 폴라로이드 필름을 흔들면서 서서히 나타나는 사진을 보고 또 보고 했었기 때문에, 완성품을 보지 않아도 전혀 문제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의 스토리이니까, 스토리는 내 손에 달린거니까.
캐이프 메이
뉴저지 남쪽 케이프 메이에서 이탈리안 식당을 하고 있는 한국인 여자 셰프를 찾아갈 때, 포트 리 쇼핑몰에 내 차를 세워놓고 그의 차를 탔다. 가는 시간 3시간 오는 시간 3시간, 돌이켜 보면, 가든 스테이트 파크웨이로 줄기차게 달리던 이 시간이 그와 나와의 황금시간이다. 약력이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가 늘어진다. 주로 그가 이야기를 했지만.
“부모 앞에서 아이를 죽이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했었어요. 그 사람들을 죽이면 그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게 아니니까요. 그들에게 지독한 아픔을 주고 싶었어요.”
계모가 자기가 낳은 아이를 위해 아버지에게 중상모략을 해 박용일을 따돌렸다는 거.
핫셀블라드 말고 또 다른 데자뷰가 떠 올른다.
대학 다닐 때의 한 남자. 조원석. 이름이 생생하다. 여고 친구랑 데이트하던 연세대 학생, 하얀 얼굴에 동그란 쇠테 안경을 낀, 한국에서 내놓으라하는 제약회사 아들이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조원석이랑 내가 왜 한강변 절두산 벤치에 앉아있었는지. 아마도 우리가 다닌 대학들과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어둑해지는 한강을 바라보며, 그는 조곤조곤 자기의 엄마가 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등학교 1학년때 알게 되었고, 자기에게 그렇게나 냉정했던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서 그랬다는 걸 알고는 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다고 했다. 지금은 화학과를 다닌다고.
얼마후 여고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원석이 너를 만났다고 하더라.
그 뿐이다. 그 시점에서 양쪽으로 다 끝이다.
여고 친구는 대학 졸업과 함께 중매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았을 때 회사생활을 하던 나는 병원을 찾아갔었다. 아가는 보질 못했고 친구 얼굴에 실핏줄이 터져있는 걸 보며 아이 낳는게 저런 일이구나 했던 기억은 쎄게 남아 있다.
한국 여자 셰프가 져지 토마토가 맛있다면서, 브라운 백 두개에 밭에서 막 딴 울퉁불퉁한 토마토를 싸 주었다. 토마토 줄기에서 나는 쌉사름히 싱그러운 풀내가 차안에 꽉 차있었다.
“그 때 내가 산 기도원에서 내려올때요. 그거 아세요? 구름을 걷는 기분이라는거. 내 발 밑에서 땅이 안 느껴졌어요.”
집에서 결혼하라는 여자를 피해 사진 공부한다고 미국에 와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 교회에서 집안에 대한 반항으로, 아니면 거듭난 마음으로 여자를 만났다는 건 - 자기 보다 10살이나 어린 여자였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 그가 미주알 고주알 말을 다 안해도 그의 인생을 알만했다.
나는 그 이후로 마켓에 가면 져지 토마토라고 써있는 걸 찾는다. 드믈지만.
그와 만나는 횟수가 늘수록 그가 나를 처음 만났을때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상상을 해보곤 했다. 어쩌면 자기 첫 사랑 여자와 내가 비슷하게 생겨서 일까? 어떤 여자였을까. 분명 사진한다고 껍정대며 베이스볼 캡을 쓰고 멜빵 달린 청바지를 입고 커다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다니던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예술이라는 걸 한다는 여자들이 좀 다 그랬다. 가장 첨단이라는 디자인 회사를 다니고 있었기에 잘 안다. 그렇다면 나와는 썩 다르다. 왜 그랬을까.
진부령 스키산장의 핫셀블라드 남자는 내가 다니던 회사의 부장이었다. 거므스름하고 기름한 얼굴 그리고 키가 무척 컸다. 짜증이 나는 오후면 어떻게 알고 내 책상에 ‘커피?’라고 쓴 메모지를 놓고 가곤 했다. 나는 회사 지하실 다방에 가서 부장과 커피를 마시며 그의 인생사를 들었다. 자기 부인은 메이퀸을 한 여자라면서 따로 산다고 했다.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스키를 배우고 와서 산골에 스키장을 짓는 일에 집념하다보니 아이들 교육서부터 가정을 지키지 못한다고 했다.
진부령 스키산장 주인인 우리 회사 자재부 부장이랑 크리스마스 이브에 서유석이 나오는 디너 파티에 갔었다. 서유석이 우리자리에 왔고 양희은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날 크리스마스라고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하얀색 루프 귀걸이를 하고 다 같이 찍은 증거 사진이 있다. 그 뿐. 그 뿐이다. 남들 생각하고는 영 다르다. 나는 그 진부령 남자와 손 한번 잡지 않았다.
양희은도 그렇게나 좋아하던 서유석과는 맺지를 못하고, 미국에 와서 뉴저지에서 살았다. 남편과 맨해튼에서 야채가게를 하면서.
양희은을 취재하던 날 박용일은 워싱톤 브릿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가 뒷걸음을 하면서 “아 바로. 그 자리. 거기에 서 보세요.”했다. 필름이 남아서 찍은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 그가 노란색과 회색의 가로 줄무늬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을 5X7 사이즈로 인화해서 주었으니까.
캐츠킬
아트 크리틱 부부의 캐츠킬 서머 하우스로 가는 날 우리는 용커스 87하이웨이 선상 샤핑 몰 던킨 도너츠에서 만났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레인지 로버를 샀어요.” 했다. 레인지 로버는 작은 트럭만한 하얀색 미끈한 차였다.
내가 옆자리에 앉아서 약도 메모지를 꺼내든다. “일단 87 North로 가는 건 아시죠. 87노스로 가다가, 엑시트 8 에서 빠지는 거예요. 거기서 부터 한 3마일가서 오른쪽에 베어마운틴 엑시트가 나와요.” 미스터 골드스미스가 이메일로 보내준 주소를 카피해서 프린트한 종이를 들여다 보고, 밖을 내다보고, 바쁘다.
“시카모어 로드로 들어섰지요. 여기서 부터 9마일가는 거예요.”
9마일. 자 이제 좀 숨을 쉬자. 레인지 로버는 산길을 신나게 달리면서도 랜드로버 처럼 흔들리지를 않는다. 차 좋다. 좋죠?
갈수록 산길이 좁아진다. 이름 모를 푸른색 꽃과 잡풀이 우거진 길 한쪽에 팻말이 붙은 바스켓이 눈에 띈다. 그가 차를 멈춘다.
바스켓에 마분지에 쓴 Wild Daisy Honey $ 2.00가 꽂혀있고 대여섯개의 꿀병이 있고, 1달라 짜리가 몇장 돌에 눌려있다. 차로 돌아와 가방을 들고 가서 5불짜리를 돌맹이 밑에 끼어놓고 두 병을 갖고 왔다. 이것이 미국 시골길의 매력이야… 그런데 나와야 할 메이플 레인이 10마일이 넘었는데도 나타나질 않았다.
전화를 걸고 나서야 알았지만, 9마일은 < . 9> 마일이었다. 그 유태인 아저씨는 왜 0.9마일이라고 안 쓰고 .9라고 썼는지, 산 자락 밑 오막집에서 미국 부부가 해주는 더덕으로 점심을 먹고, 근처 작은 폭포까지 다녀오고 나서는 숫자를 쓰는 스타일에 대한 유감은 까맣게 잊어먹었다.
용커스 쇼핑 몰에 도착했을 때에는 한 여름 해가 넘어가 버렸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과 아이들 때문에 부랴부랴 헤어지느라 꿀병 하나를 가져와야 하는걸 까맣에 잊어먹었다.
그가 중국을 다녀온 후에 가졌던 소호 브룸 스트릿의 비좁은 갤러리 개인전에 남편이랑 같이 갔었을 때, 그 와중에, 그가 내게 한말을 나는 두고두고 써먹는다.
“나랑 친한 사진 작가가 그러는데요. 중국 어느 도시에 가면 나처럼 생긴 사람이 많이 살더래요. 쌍꺼풀 지고 코가 오똑한 동양얼굴들이요. 중동의 피가 섞인 거지요. 맞아요. 우리 노씨가 중국에서 왔다고 하더라구요.”
거기 까지다.
그 후부터 그에게 연락이 안되었고, 뒤 소문으로는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어떻게 나한테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잡지사에서는 디지탈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젊은 사진작가들을 소개했고, 계속해서 한국으로 보내는 기사는 썼지만 그와의 소식은 두절이 되었다.
하지만 라이프는 두절되지 않는다. 대학 당시 그가 쫓아다니던 연극하는 여학생이 그의 친구와 결혼 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서 들었었는데, 그 연극하는 여학생이 알고 보니 내 친구의 친구였다. 인연의 인연이다. 우연같은 인연에 무슨 필연이 엮여있을까.
연극하는 미녀는 뒤 늦게 뉴욕에 와서 친구의 친구인 나를 찾았다.
그 여자를 통해서 박용일이 내게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꿰 맞춘다.
그는 내 어린시절 부터 있던 명동의 이층짜리 건물 레스토랑 ‘신정’의 아들이었고. 새 어머니를 물리치고 아버지가 명동과 강남 비지네스를 박용일에게 물려주었다는 것. 그래서 거의 20년을 뉴욕에서 불법 체류자로 살다가 한국에 부랴부랴 갔다고 하는. 뉴욕에서 같이 산 여자는 고등학교도 안나온 여자였다는. 암만 여러번 만났었더래도 내가 도저히 엮어낼 수 없는 라이프 스토리다.
예술의 전당
그를 깡그리 잊어먹고 한참을 살았을 것이다. 살기가 바쁜 이민생활이니까.
그러다가 한국에서 그를 만났다. 잡지사에 들리니 그 동안 박용일 씨가 찍었던 사진을 이용해서 Then And Now 특집을 하자는 것이다. 잡지사 사장이 “잠깐만” 하더니, 그에게 문자를 보낸다. “노려 왔어요” 즉각 올라온 답 “ 갈께요.” 를 잡지사 사장이 눈을 찡긋하며 내게 보여준다.
서울 근교에 산다고 하는 박용일이 당장 한남동에 나타났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곱슬머리가 길어진 것 말고는. 그는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며, 약간 더듬거리며 “아, 아 안 달라졌네요” 거짓말을 한다.
멀리 한강 다리의 불빛을 바라보며 세명이서 와인 세병을 가볍게 마셨다. 다음날, 그와 나는 예술의 전당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뉴욕 여자와는 헤어지고 20살 아래의 여자와 산다고 했다. 그 사이에서 딸이 하나. 너무 이쁘단다. ‘신정’은 누나에게 맞겼단다.
잡지사 일을 뉴욕에 가서 하려면, 지금 갖고 있는 1800년대 사진기라는 쌀뒤지 만한 나무박스에 헝겊이 덮힌 이상한 카메라를 갖고 가야하는데, 그건 특별 화물로 운반해야 한다고 했다. 그 사진기로는 사진을 찍자 마자 15분 안에 인화를 해야하는데 인화하는 도구를 실으려면, 레인지 로버가 또 있어야 한다고.
프로젝트를 접었다.
내가 뉴욕으로 돌아온 후 몇 달후 잡지사 사장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박용일이 죽었어. 자동차 사고로.> 스포츠 카 경기에 나가려고 자신의 스포츠 카를 찾아서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800년대 카메라로 찍은 사진 전시나, 사망에 대한 미디아의 글에는 그가 평소에 한 말이 인용 되어있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어쩌면 마지막 옛 모습일 수도 있는 그곳의 시간과 공간을 사진을 통해 간직하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한 순간 밖에 없는 옛 모습을, 팬 하나로, 아니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글을 통해 간직하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어딜가나 예쁜 여자를 좋아한 그가 나를 좋아했었는지 그 답을 얻지 못한체 그와의 문이 닫혀진 것이 좋다. 언제든지 케이프 메이의 져지 토마토와 그의 차에 두고 내린 캐츠킬 꿀병을 꺼내 보면서 그의 깜빡이는 눈을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2022-2
Semi Auto Biography …….this is not a story, only life. <알리스 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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