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만나기로 한날
뚫어지게 수첩을 들여다 본다. ‘이날은 안되고... 이날은 절대로 안되고….’
영아가 혜진이를 만나려면 할일을 미리 하던지 미루던지해야 하는데 그 보다 먼저 남편이 문제다. 가게를 자주 비우는것도 아닌데도 신경이 쓰이고 남편이 먹을 걸 미리 준비하는 것도 귀찮다.
우선 남편에게 뜸을 드린다. “혜진이가 다음주에 온다네. 여보, 화요일이 괜찮겠지? 월요일은 수잔이 생일, 수요일은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잖아.” 남편이 “아, 괜찮지.” 하고는 “근데 이번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나?”라고 하자, ‘무슨남자가 와이프 친구까지 일일히…’문득 짜증이 난다. “그래 화요일 만나자고 전화해야지." 옆에 있는 남편에게 공연히 크게 말을 한다.
남편이 미국 지사로 발령 받자, 남들은 미국미국하지만 영아는 미국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 걱정이었다. “동창이 한명 있긴 있는데, 한번 수소문 해봐야 할까? ” 하자 남편은 “아니 국문과 학생이 왜 미국으로 유학을 갔지?”로 부터 시작해, 영아가 처음 혜진을 만나던 날, 두 번째로 만난 날… 그리고 긴 세월 혜진이와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히 알고 있는 남편이다.
언제나 처럼 쩡쩡울리는 혜진의 목소리다.
“응 좋아좋아. 화요일. 10시? 좋아, 프런트 데스크에서 전화해. 내려갈께.“
“잘 지내다가 잘 와라. 잘 자.” 영아는 혜원과 마주한듯 웃는다. 전화를 끊으며 얼굴을 천천히 편다. ‘그렇지, 억지로라도 하루 좀 쉬는 것도 필요해. 영아는 요즈음 짜증이 부쩍 늘어나는 자신을 안다. 분명 어디 좋은데 가서 브런치를 하자 할테고, 아마, 쇼핑 가자고 하겠지? 그리고 32가에서 이른 저녁 먹고, 그랜드센트럴로 가면 딱 되겠군’ 머리 속에 들어있는 기차 시간까지 맞추어 보고나서 길게 숨을 내쉰다.
혜진이 아틀란타로 이사를 가고 부터는 그애를 만나는 일이 큰 행사처럼 느껴진다.
*
혜진은 32가에서 푸짐하게 한국 음식 먹을 생각에 군침이 돈다.
한국에서 북 사이닝을 하고 와서 곧장 LA와 시카고를 다녀 왔다. 뉴욕에는 부산 출판사 직원과의 미팅이 잡혀 있다. 그가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우아.감탄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뉴 멕시코에서 산 아메리칸 인디안 골동 조각을 가지고 가서 허드슨 강이 바라보이는 창 앞에 놓으면 석양이 더 드라마틱하게 보이겠지. 경상도 남자를 7시에 오라고 해야겠다.
콘도 32층 아파트를 산 후로는, 뉴욕에 갈때 마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들이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을 위해, 길다란 칼라릴리 몇 가지를 유리병에 꽂거나, 단풍 든 나무가지를 통째 커다란 항아리에 꽂아 놓거나 했었는데, 글쎄, 이번엔 좀 피곤하다.
‘하긴 영아를 만나 수다 떠는 일이 바로 쉬는 일이지 뭐.’
처음 만났을 때 큰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던 영아의 모습은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모습뿐 아니라 행동도 그렇다. 이번에 가면 할 이야기가 많다. ‘ 걔네들… 나랑 아주 친했던 것처럼 말이야.’ 자기도 모르게 혜진의 턱이 올라간다.
19살에 발 딛은 미국은 완전 딴 세상이었다. 아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곳에서, 동양얼굴이 오히려 관심을 살수 있다는 걸 혜진은 곧 알아챘다. 아무런 꼬리표가 없이 새로 시작했다. 영어가 서툴러도 용서가 될 뿐만 아니라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자 문법마저 정확하다고학생들과 교수들이 놀란다. 상도 타고 장학금도 탔다. 캠퍼스를 혼자 조용히 걸을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Hi Jean ~ 하이 진~하며 옆으로 다가 온다. 교수는 혜진이가 학교에 남기를 바랬지만 이름도 없는 대학에 남고 싶지 않았다. 더우기 오레곤 이라는 시골에 살기 싫었다. 한국으로 다시 간다는 일은 아예 계획에도 없는 일이다.
손님들 앞에서 나비야, 나비야…..고개를 까닥이며 노래하는 언니에게, ‘아이고 귀여워라, 어쩌면 박자를 딱딱 맞추네’ 라며 떠들어대는 아줌마들의 소리를 들으며, 한 구석에서 장판지가 들썩한 곳을 손 가락으로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아이고, 야야.” 손등을 탁 친다. 혜진의 가장 어린 기억이다.
남 동생이 태어나자 누구도 보지 않는 뒤 쪽에서 혼자 놀곤 했다.
혼자 하는 일에 자신이 있었는데, 이제는 여러사람과 하는 일에 더 자신있음을 알았다. 자기가 한 자그마한 일 하나에도 감탄을 하고 칭찬을 한다. 이제는 좀더 큰 물에 가야겠다.
그렇다. 뉴욕이다!
물어물어 찾아온 뉴욕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꼬리표가 달리지 않기는 마찬가지, 아무도 자기에게 눈을 주지 않는다. 오케이, 뉴욕에서는 뉴욕식이다. If I can make it there, I'm gonna make it anywhere …
델리가게에서 일했다. 시간당 6 불이다. 장당 5불 받고 영어번역을 했다. 사우스 맨해튼 법정에서 한국어 통역을 시작하자, 코트에서 자주 불렀다. 뉴 스쿨 수업은 주말과 밤시간에 택했다. 코트에서 만난 신참 변호사 제임스와의 데이트는 그가 아이들을 보러 한달에 두번씩 뉴 저지로 가는 주말을 감안하며 호시탐탐.
혜진은 어느 새, 뛰듯이 걷는 뉴요커가 되어갔다.
어느날 전화를 받았다.
“핼로오오.” 완전 한국 억양이다. “네에?” 하자, 전화 저쪽에서 놀람과 안도의 숨소리가 들린다. “아, 저, 어… 너, 김혜진이니?” “네? 누구신지?” “ 나 혹시 기억나니? 박영아. 우리 같은 과였지. 이수현한테서 너의 전화번호 받았어.” 한국말이 너무 반갑다. 대학동창이라고? 박영아? 머리 속에 얼핏 짧은 머리의 예쁘장한 얼굴이 스쳐간다.
“어머나, 박영아, 생각나지. 영아야, 너 어디야? 여기 왔어?”
“으응, 6월에 왔어. 아이들 학교 등록시키느라 정신이 없었어. 이제 겨우.... 그런데,”
약간 주저하는 듯 “얘, 그런데, 느닷없이 전화해서 미안해. 부담 갖지 마. 그냥 뉴욕에 동창이 있다는 것만해도...” 한다.
나즈막한 영아의 전화 목소리만으로 선뜻 만나자 했다. 좋은 애 같았다. 혹시 대학시절 자기를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의 모습을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만났던 날
달력 숫자 하나를 지우며 혜진이 만날 날을 세어본다.
몇 년전 한국에 가서 만난 동창들은 혜진이 얘기만 했었다.
‘걔가 그렇게 성공할 줄을 누가 알았겠어? 우리 과에 걔가 있는 줄도 잘 몰랐잖아. 유학 간 줄도 나중에 어디서 들어서 알았고 말이야. ’
그렇지, 영아가 뉴욕에서 처음 혜진을 만났을때, 혜진은 대학 때 모습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렇게 살 수도 있을까 했었다.
맨해튼 남단 드웨인(Duan) 스트릿으로 찾아갔다. 어둡고 좁은 층계를 한 없이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자 문을 활짝 열리고 혜진이 나타났다. 기억 속 얼굴과는 완전히 달랐다. 머리카락을 깨끗이 뒤로 넘긴 갸름한 얼굴에, 가늘고 긴 혜진의 눈이 잠시 흔들렸던가. 찰라같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분명하다. 그 눈은 지금도 만가지 생각이 동시에 엇갈리듯이 바쁘게 반짝 거린다. “영아야! 어서 들어와.” 정말로 반가운듯 했다. 현관을 들어서자 침대와 식탁과 책상이 한눈에 보인다. 오헨리의 소설 안으로 쑥 들어 온 듯했다.
혜진의 스토리가 바로 오 헨리 소설이었다. 앞 건물 창문에 전등빛처럼 비추던 햇빛이 사라질 무렵 둘은 남대문 시장보다 더 복잡하고 지저분한 거리, 차이나 타운까지 걸어가 점심을 먹었다. 질척한 땅 바닥을 지그재그로 척척 앞서 걷는 혜진에게서 질긴 삶이 느껴왔다. 색다른 맛이다. 남편 회사에서 내준 집은 조용하고 깨끗하고 학군이 좋다는 동네에 있었지만,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다음은 우리집에서… ” 헤어질 때 둘은 이미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뚱뚱한 흑인여자가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 앉으며, 영아는 미국은 한 번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한번은 말이다.
아무 주저 없이 미국에 주저 앉았다. 맨해튼 브로드웨이 25가에 뷰티 서플라이 가게를 인수하고 부터는, 대학 정보에 혈안이 되어 절대 속을 안 보이는 한국 학부모들, 가족처럼대하면서도 결코 그 속을 알수 없는 교회 여신도들과는 혹 친해보려고 해도, 시간이 없었다. 가끔 혜진이가 불쑥 가게로 들어서면 남편은 어서 같이 나가라며 영아 손에 지폐를 쥐어준다. 혜진과 함께 뉴욕 구석구석을 다니면 생기가 돌았다. 그 기분을 영아는 < 빌딩 숲 한 가운데 옹달샘에서 두 손으로 한 웅큼 떠 마시는 물 맛이다.>이라고 일기에 적었었다. 혜진이가 시티 홀에서 결혼할 때는 한복을 입고 분위기를 살려 주었고, 포코노로 신혼 여행갈 땐 차를 빌려주었다. 그 둘을 집에 불러 한국음식을 해주고 LA갈비를 싸 보내는 것은 ‘제임스가 네가 만든 갈비가 최고란다’.라는 말을 들으려는 건 아니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중에도 자기에게 시간을 내주는 혜진에게 해줄 수 있는 걸 해주고 싶었다. 둘 사이는 그렇게 다져졌다.
그런데.
혜진이가 뉴 스쿨 강사가 된 후 영아네를 자주 캐츠킬 주말 하우스로 초대하곤 했는데 그 곳엔 의례히 다른 친구들이 왁자지껄 와 있었다. 주로는 미국인 교수, 변호사 또는 출판 관계자들이다. 한두번 가보고 나서 남편이 “난 뭣땜에 가겠어. 당신 친구니까, 당신 가서 잘 놀다와. 내 걱정말고.”하며 슬쩍 빠진다. 혜진이가 손님들을 서로 소개시키다가 영아 차례가 되자 잠시 머뭇하고는 뭐라 할말이 없다는듯 어깨를 살짝 들척이고는 슬쩍 지나쳐 버린적이 있고나서 영아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혜진이가 아틀란타로 떠날 때 섭섭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을까.
만나기 전날
집에 오자마자 부엌으로 가 싱크에 들어있는 아침 먹은 그릇들을 보면서 진저리를 친다. 언제건 시간이 나면 글을 쓰겠다고 했던 ‘언제건’은 계속 ‘언제건’이다. 냉장고문을 탁탁 열고 닫으며 저녁준비를 한다.
남편을 만나기 전, 지방 문예지에 글을 내면서 작가의 길을 꿈꿔보지 않은 건 아니다. 몇년 전, 가게 뒷방에서 쓴 글을 남 몰래 한국 라디오 방송 이민수기에 보내어 장려상을 받았다고, 꼭 글을 써야하는 건 아니다.
혜진이가 책을 낼 때마다 같이 기뻐했다. 드레프트를 읽어봐 달라고 하면 정성을 다했었다. 영어로 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는다.
“벌써 3판 인쇄를 했어? 우와.” “어머나, 한국어 번역을 네가 했다고? 그래 당연하지. 너 보다 더 잘 할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니.” 국문학을 하고 미국서 영문학을 한 혜진의 동서를 망라하는 글은 눈을 뗄 수 없이 재미있다. “너 퓰리처 상 타는 거 아냐?”
저녁 먹은 설거질을 하고 냉동실에서 꼬리뼈 패키지를 꺼내 놓고는 컴퓨터 앞에 와 앉는다. 자판기에 손을 얹고 있을 뿐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는다.
혜진의 책이 교보문고에 쫙 깔렸더라며, TV에 나온 혜진이가 몰라보게 이뻐졌더라고 하던 수현이는, 혜진이가 이혼하고 젊은 남자 만난다는 일조차 부러워 했었다. 하지만 영아는 그 젊은 남자도 끝냈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초점 없이 화면을 바라보다가 쓰다만 파일을 꺼낸다. ‘혜진이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 진흙에 빠진듯한 일상에서 벗어 나듯 혜진을 만나곤 했는데 얼마전 부터는 혜진을 만나고 나면 진흙탕을 친 기분이 들곤 했다. 수현이가 한 말이 물에 빠진 시체가 떠오르듯 자판기 컴퓨터 스크린에 떠오른다. “혜진이가 널 걱정 하더라. 대학신문 편집장까지 했지만, 미국에서 한국어로 뭘하겠냐는 거지. 영어만 좀 잘했어도 가게 뒷방에 웅크리고 있을 애가 아니라고. 참 안됐다는 거야.” 귀에 울리는 수현의 목소리가 물 귀신처럼 영아를 잡아당긴다.
롱 아일랜드 한국학회에서 모집하는 ‘내가 사는 미국’에 응모하려고 하는건 남편도 모르는 일이다. 미국에서 한국어로 글을 써야 한단 말인가. 이미 한국어도 어눌해졌는데.
컴퓨터를 끈다.
*
침대 앞에 가방을 열어놓고 가져갈 것을 던져넣는다. 거울 앞에서 구슬이 달린 빨간색 스웨터를 대어본다. 눈가의 주름살이 눈에 거슬린다. 회오리 치듯 지낸 세월의 자국인가. 그랬었지. 뉴욕을 떠날 수는 없었지. 제임스가 시니어 파트너가 되어 아틀란타로 올때, 혜진이도 죠지아 주립대학에 자리를 잡았지만 맨해튼에 아파트는 남겨놓았다. 방학때 뿐 아니라 많은 시간을 주로 혼자 와서 뉴욕 문화계의 줄을 엮어갔다. 제임스가 위자료조로 포기한 아파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맨해튼 집 값에, 지금 콘도의 시드머니가 되기엔 택도 없는 일… 스웨터를 느슨히 접어 가방에 넣으며, 전화를 한다.
닥터 리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메시지를 남긴다. “저예요. 왜 이렇게 빨리 보고 싶은지 모르겠네요. 월요일 아침 도착이예요. 제 시간은 언제라도 다 비어 있어요.”
전화를 끊으며, 너무 저자세로 말했나? 아니, 이렇게해야 꽉 잡을수 있지.
‘영아랑은 화요일이지? 부산 출판사는 그럼 수요일 저녁...그리고…’ 스케줄을 짜 맞추어 본다. ‘닥터 리한테는 내일 도착해서 전화하면 되고. 오케이, 됐다. 허드슨 야드라는데 가서 근사하게 저녁을 하자고 해야지. 그리고 ….’
인디안 목제 조각품을 잠옷에 둘둘 싸서 가방 한 가운데 넣는다.
라과디아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88아저씨가 “아이고, 오랜만에 오셨이유. 짐은 이거 하난기요?” 혜진은 좌석에 깊숙히 앉아 전화를 한다. 신호가 한참 울리고 나서 “어, 왔어?” 하는 닥터 리.
“저 오늘 시간 다 비웠어요.”
“누가 오늘 된다고 했나?”
“네에?”
“오늘 중요한 일이 있다 했지... ㄴ, 내일.. ㅈ 점....” 택시가 미드타운 터널로 들어가자 전화가 끊긴다.
만나는 날
옷장을 연다. 무얼 입을까. 지난 번 만났을 때 생각이 난다. 혜진이가 오페라 표 두장이 있다해서, 그 때도 옷장을 열고 한참을 망설였다.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혜진이 영아를 아래위로 살핀다. “아이, 좀더 이쁜 옷 입지 그랬어.” 하더니 곧, “이럴때 우리도 한번 화려하게 입어보는 거 아냐?: 하며 깔깔 웃는다. 영아도 웃었다. 좀 어색했다.
또 언젠가는 “얘, 그 차림으로는 트러플 곁들인 파스타 먹으로 가기가 좀 그러네.” 하던 말도 글자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자격지심이야’ 애써 마음을 지운다. 그게 솔직한거야. 돌려서 말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영아는 늘 입는 옷을 꺼내 입는다.
차를 세우고 가게로 들어오는 남편에게 “여보. 나..” 하자 “ 알았어, 잘 놀다와.” 하는 남편이다. 돌아서는 남편의 유난히 희끗한 머리가 안스럽다. ‘물을 들여줘야겠네.’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진숙의 아파트를 향해 걸어가는 영아는, 그래도 미국 생활 처음부터 같이 걸어온 친구인데, 귀한 인연이지….. 마음 밑에서 무겁게 꿈틀하는 무언가를 달랜다.
*
혜진의 이름을 말하자 도어 맨이 유창하게 ‘안녕하세요.’한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혜진이 튀어 나오듯 양손을 흔들며 달려와 영아를 껴 안는다. 뭐야 너 이뻐졌잖아. 뭐 한거야? 한발 뒤로하며 얼굴을 들여다 보는 척한다. 나가자. 요 앞에 프랜치 베이커리가 새로 생겼더라구.
줄이 길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옆 사람과 한 테이블을 나누어 비좁게 앉았다. 메뉴를 한참 들여다보고나서, 결국 영아는 알몬드가 덮힌 크로와상을 정한다. “ 응, 나는 시나몬 프렌치 토스트 먹을까. 얘 우리 어니언 수프도 먹자. 브리오쉬도 하나씩 하고. 실컨 많이 먹자. 더 시켜.” 이번에 한국에서 받은 인세는 아틀란타 한인회에 한글 백일장 기금으로 다 기부를 했다는 이야기, 한국에서 작가 누구와 누구를 어디서 만났고, 언니와 남 동생에게 제주도 여행을 해주면서 ‘제일 좋은 호텔로 가자’했더니 언니가 자고 나올 호텔에 왜 돈을 쓰냐 먹는데 쓰자 했다는 이야기…입을 다물 새가 없다.
“얘, 정말 놀랐어. 수현이가 하얏트 호텔로, 민정이 알지? 메이퀸 했던애. 걔도 불렀더라구. 한 서너명 나오는가 했더니 8명이 나왔어. 글쎄 얘네들이 내 책을 들고 나온거야. 사인해달라고. 나는 또 내책을 무겁게 들고 갔는데 말이야. 내가 샀지. 돈 버는 애가 사는 거 아니니.”
웨이터가 테이블에 와서 쓰윽 둘러보고 가자, 혜진이 갑자기 놀란듯 시간을 본다. 영아가 웨이터를 부른다. “멀리서 온 손님인데 내가 낼께”
베이커리를 나오며 영아가 속으로 진숙이가 아직 새로 문 연 허드슨 야드 샤핑 몰엔 안 가봤을테니 거기 가자고 할까, 하는데, 진숙이가 ‘그래. 너 이제 가게로 갈꺼니?” 한다.
“어디? 가게, 응? 우리가게?” 분명히 전화로 저녁은 한식으로 먹자고 했었는데.
혜진이 영아의 어깨를 두드린다.“잘 먹었다 얘. 너 모처럼 나왔는데 어쩌지. 나 오늘 오후에 약속있다고 말했었지?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더 좋네, 그럼 잘 가구. 내가 가기 전에 또 연락할께”
만나고 나서
허둥지둥 콘도로 향하는 혜진을 보며, 영아는 남편 생각을 한다. 밤에 집으로 올줄 알고 있을텐데, 가게로 불쑥 들어서는 자기를 보고 놀랄 남편에게 뭐라고 말할까. 가게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까 좋구나. 오늘은 맨해튼에서 저녁 먹고 들어가자고 해야겠다. 허드슨 야드 식당하나를 예약하지 뭐. 뼈국은 두고 두고 먹고.
그렇다. 콩과 콩나물은 완전히 다른건데. 이제 비교는 끝.
왜 이렇게 마음이 가벼운 걸까.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 건데.
영아의 머리 속에서는 글이 줄줄 풀어지고 있었다.
*
허둥지둥 콘도로 돌아온 혜진은, 빨간색 스웨터와 흰색 스웨터를 들었다 놨다 거울을 본다. 영아랑 한시간 정도 있으려고 했는데, 두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 닥터 리의 사무실까지 가려면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 아무말 없이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영아에게서 기어코 감탄과 칭찬을 들으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닥터 리와의 약속까지 놓칠뻔 하면서 말이야. 서둘러 화장을 고치는 손이 떨린다.
도어맨의 인사를 무시하며 부랴부랴 뛰어나와 택시를 잡는 혜진의 눈은 닥터 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하나, 빠르게 깜빡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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