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는 사연
2016
동네 헬쓰클럽엘 들어서는데, “엄마. 음...그거 음 그 게 어,언제 받은거냐구……” 굴리는 발음으로 떠듬거리는 한국말이 들린다. 서류를 손에 든 아줌마가 보인다. 분명하다. 영어 못하는 엄마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뭔가를 따지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들 옆을 급히 지나쳤다. 내 동양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이 장면을 보고 싶지가 않았던 때문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80년대 초 미국에 오자마자 한국 교회 여름 성경학교 선생을 했다. 미국이란 나라가 신기하기만 하던 나는 거의 모든 부모들이 아이에게 한국말을 하고 아이는 영어로 대답하는 것이 더 신기했었다. 그 이후 내가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나도 내 아이와 의사소통을 잘 못하며 살겠구나. 조금이라도 미국 말을 잘 해야겠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당장 눈 앞의 일이 더 급했던 시절이다.
내 아이들 쪽에서도 한국 학교를 다니긴 했어도 한국말을 잘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뱃 속에 아이를 두고 걱정했던 대로 서로가 말이 불충분 채로 살아왔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아이의 가정은 좀 다르다. 부모자식간에 자연스럽게 한국 말을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들이 부모 대신 영어를 해주는 일이 흔했다. 야채가게 하는 부모님의 온갖 서류를 번역해주며, 학교를 빼먹고 랜드로드를 만나 통역해주곤 했다는 50대의1.5세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뉴욕에서 4 시간 걸리는 대학을 다닐 때에도 걸핏하면 부모에게 불려 복잡한 일을 해결했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통역을 시키거나 서류를 해석해 달라고 해보지는 않았지만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영어 앞에서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미국사람과 대면을 할 때 마다 콩글리쉬를 하지 않으려고 미리부터 고민을 하는 것은 30년 전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느 젊은 종교인에게 전화를 할일이 있었다. 스마트 폰에 뜬 낯선 번호를 보고 내 전화를 받지 않더라도, 이 사람이 한인 시니어 공동체를 지도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길레 한국 말로 메시지를 남겨 놓으면 된다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자 벨이 두세번 울리자 전화를 받는다. “핼로우.” 나는 당연히 “여보세요.”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또 ‘핼로우’를 한다. 잘 안들리나, 다시 분명하게 큰 소리로 ‘여보세요.’를 하자 이번에도 ‘핼로우’로 답을 한다. 할수 없이 영어로 ‘저는 뉴욕 한국일보의 노려라고 합니다.’ 나를 소개했는데 대답이 없다. 나는 머뭇했다. 그 다음말을 뭐라고 해야 하나? 문법에 맞게 “ OOO씨와 통화할 수 있냐.” 또박또박 말을 하자 저쪽에서 또 미국식으로 “스피킹.” 한다. 세상에, 이 사람 한국말 못하나? 두서없이 영어로 용건을 말하기 시작하자 그가 갑자기 한국말을 하기 시작한다. 휴. 살 것 같았다. “지금 제가 밖에 있는데요. 한 시간 후에 전화드리겠습니다.”한다. 전화를 끊고 났는데, 한국사람한테 엉성하게 영어를 한 것이 챙피했다. 아니 그렇게 한국말 잘하면서 왜 핼로우를 고집했을까. 떨떠름했다.
이민 초기에는 ‘때르릉’전화가 울리면 긴장을 했다. ‘핼로우’ 해 놓고는 상대방이 쏼라 쏼라 영어를 시작하면 알아 듣지를 못해 당황했었다. 물론 한국 사람은 내가 핼로우를 해도 여보세요 한다. 시대가 변화에 감에 따라 전화벨이 울려도 상대가 누군지를 알기 때문에 많이 편해졌다. 하지만 ‘핼로우’와 ‘여보세요’로 전전긍긍하기는 전지전능한 스마트 폰을 쓰는 요즘에도 마찬가지다. 잘 알지 못하는 젊은 한국 사람에게 전화를 할 때마다, 이 사람이 한국어를 할 줄 아는지 영어 밖에 모르는지 걱정을 한다.
아무래도 언어장벽이 더 높아지기만 하는 것 같다.
벙어리가 아닌 다음에야 ‘말하기’가 답답하면서도, 이걸 운명처럼 순순히 받아드리고 살아온 내 모습이 갑자기 초라해진다. 어려운 서류는 사전을 찾아보며 해결했고, 급하면 미국 사람들하고도 분명하게 뜻을 나눌수도 있으니 이 정도면 된거지. 이제와서 뭘 어떻게 더 하랴. 여기서 멈추어 있는 게을은 내 모습이 보였다.
물론, 여기서 학교 다니고 미국 직장을 갖고 있는 한국 사람들도 영어보다는 한국말을 하는 일이 더 편안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영어를 잘 하면서 모국어가 편한 것 하고, 영어를 잘 못해서 첫 마디 ‘핼로우’에도 전전긍긍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래 지금 부터라도 영어공부를 하자.
은퇴를 하면 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섹스폰을 배우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 동안 안돼는 영어로 살아 왔는데, 이제는 좀 편하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남은 인생을 편하게 즐겨보고 싶어하는 마음일테다. 하지만 은퇴 후에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직도 영어 땜에 주눅이 드는데, 일선에서 아주 물러서고 나면 자꾸 더 안으로 오무라드는 내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 못했던 일도 인간의 근본인 ‘말하기’를 못하면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그래 알았다. 영어공부다. 마음을 굳힌다. 공부 방법을 찾아 본다. 방법은 수천가지다.
왜 진작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1.5세 쯤 되는 그 종교지도자가 나를 당황하게 했던 것이 오로지 언어장벽 만은 아니었음이 후에 밝혀졌다. 한 시간 후에 전화하겠다던 약속을 어긴 그에게 다음날 다시 전화를 하자 그는 또 ‘핼로우’를 두어번 고집했고, 내가 그 단체의 행사를 취재하고 싶다고 하자 유창하다 못해 완벽한 네이티브 스피커의 한국말로 ‘신문에 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저는 아닙니다.’라며 신문에 기사가 나가는 걸 꺼려하더니 나중에는 자기 전화번호를 내게 알려준 사람까지 비난을 했다. 몇 마디가 오고 가고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는다. 그 때 내 기분은 떨떠름이 아니다. 분노였다. 핼로우와 여보세요의 문제가 아니고 인격의 문제였다. 영어 잘 못하는 나이든 한국 사람들을 지도하면서 마치 자기가 높은 자리의 인간이나 되는 줄 망각을 한, 격이 낮은 사람임을 뒤 늦게 알아차린 나를 후회했다.
하지만 더 큰 후회는, 내가 미국에서 일제 강점기 만한 세월을 살고도 아직도 ‘핼로우’에 갈등하는 게을음이다.
오케이. 두고 보자. 나, 영어 공부 열심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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