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세상
멕시코 불법 이민자 아이들을 그 부모와 떼어놓는 일이 뉴스를 장식하기 시작할 때 거의 30년전에 보았던 영화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가 생각났다. 아이들이 한 대여섯 살쯤 되었을 무렵, 메릴 스트립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 영화를 ‘블락 버스터’에서 빌려다 보았다. 서브타이틀도 없이 대충 줄거리를 따라가던 어느 순간에 ‘세상에!' 했다. 나치 군인은 장난치듯 메릴스트립에게 가볍게 말한다. “ 둘 다 죽여야만 하지만, 너를 봐서 하나만 죽일 것이니, 죽을 아이를 네가 선택하라.”
그 당시, 나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나의 두 아이에게 두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가 없어지면 내 아이들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될까, 그 때문에 내 건강을 살피던 때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목숨보다 중한 아이들 중에 죽어야 할 아이를 엄마가 선택을 한단 말인가. 그 나마 하나라도 살릴려고 절규하던 메릴 스티립. 영화를 마저 보질 못했다. 이 시대 멕시코 엄마의 심정이, 영화 속 소피의 마음과 뭐가 다를까.
그 정책을 시행했던 국방 안보장관 크리스틴 니엘슨(Christjen Nielsen)이라는 여성은, 나치도 아니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가 했다. 정책에 순종했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 할수 있을까?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 있는게 아닐까. 하긴 요즈음 나에게도 근본적인 인정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최근 벌어지는 온갖 잔인한 학살 사건에 무덤덤해지는 나를 본다.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친구로부터 가끔씩 미국과는 정반대로 피고 지는 꽃과 나무 이야기를 듣곤 한다. 이슬람 사원 희생자 장례 행사에 참여하고 온 이 친구가, ‘Morning has broken’을 부른 영국인 가수 (이슬람교로 전향하고 이름도 유스프 이슬람으로 바꾼) 캣 스티븐스가 참여했다면서, 그 사건으로 며칠간 우울해서 혼났다고 했다. 나는 ‘‘아 그랬구나.’하고는 곧 구글로 대학시절 즐겨 듣던 캣 스티븐스 노래를 찾아 보았다.
미국에 살아오는 동안 겪은 대량살인사건은, 오클라호마 폭탄 사건서부터 이루다 셀수가 없다. 최근에만해도 유치원, 고등학교, 교회, 유태인회당, 나이트 클럽 등에서의 총기사건. 이정도의 뉴스에는 무뎌져버렸다는 것을, 스리랑카 부활절 총기사고 때 절감했다. 스리랑카 기독교인들이 어처구니 없이 죽어 가던 날, ‘해피 이스터’, ‘부활절 즐겁게 지내세요’. 카톡 인사를 받으며, 화사하게 차려입은 교인들과 삶은 달걀을 먹으며 화기애애했다. 또? 스리랑카? 신문의 큰 제목만 보며 ‘ 이번엔 인명 피해가 크네.’하고 말았다. 그러면, 지난 주말 유월절 마지막날 캘리포니아 유태인 회당에서 벌어진 혐오범 소식에는 ‘겨우 한명 죽었네.’라고 해야 하나?
잠시 생각해본다. 인간은 이렇다쳐도 기독교인의 하나님, 모슬림의 하나님 그리고 유태교의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백성들이 이렇게 죽어가는데 뭘 하고 계시는 걸까. 하긴,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아담과 이브는 곧바로 하나님 말을 안들었고, 아담과 이브의 자식은, 즉 하나님의 손자들은 형제지간에 살인을 저질렀다. 막나가는 인간을 하나님도 어쩔수 없으신가보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소피가 후에 뉴욕에 와 또 다른 어려운 선택들을 하며 자신의 인생을 꿋꿋이 살아 낸것, 또한 미국 어느 단체가 ‘Fortune’ 지가 정하는 500 회사에게 멕시칸 어린이를 격리시킨 트럼프 관리들을 어떤 형태던 채용하지 말며, 특히 크리스틴 니엘슨을 절대 채용하지 말라는 서명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이다.
하나님도 어떻게 못한 잔인한 인간과 그나마 사랑을 실현하려는 인간들 사이의 줄다리기 같은 세상이다. 하나님은 사랑쪽에 스셔서, 인정과 도덕과 양심과 정의를 지키려는 인간들의 줄을 잡아 주실테지…
2019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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