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1월
가을. 낙엽. 인생
"나무는 비야."
몇 년전 노오랗게 물든 나무에서 정말 나뭇잎이 비가 쏟아지듯 떨어지는 광역을 무심코 바라보며 운전을 하는데 디에 앉았던 네살 짜리 두째 아이가 한 말이었다.
저물어가는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기 불처럼 노오란 나뭇잎들이 도로 이에 비처럼 흩날리는 장면은 철 없는 어린남자아이 조차도 시인의 마음이 되게 하는 힘이 있었는지.
그 후로 가을이 되어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인준아 나무가 비야?" 하고 꼬마를 놀리면서 찬찬히 계절을 음미하곤 한다.
미국에 와서 처음 맞은 가을 단풍을 잊을 수가 없다.
멀리 시골로 나간 것도 아닌데, 살고 있는 동네의 거리마다 집집마다 그 많은 나무들이 색색으로 물들던, 그리고는 발 밑에 수북이 수북이 쌍이던 낙엽.
쓸어내어도 쓸어내어도 돌아서면 또 쌓이는 낙엽에 압도도기 말았었다.
한 여름 더위가 가시면서 어느날 문득 마치 흰머리카락 생기듯 나무잎이 하나씩 둘씩 물들다가,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하면서는 몽퉁이로 나무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밤새 비라도 온날 아침이면 그 색이 더욱 더 선명해진다.
서울에서 산 30년 동안 그런 선명한 색의 단풍잎을 못 보았던 것 같다.
한 며칠을 왠지 바쁘게 지내다 어느 날 해질 녁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새삼스럽게 울긋불긋 물든 나무들이 눈에 들어와 가슴이 뭉클 하곤 한다.
나뭇잎의 색이 변하는 가을은 세월의 변화를 가장 마음 깊이 새겨주는 때인것 같다.
언 땅을 헤치고 돋아나는 새싹을 보는 봄이나, 뜨거운 햇빛의 여름이나 또 꽁꽁 어는 겨울과 달리 가을에는 공연히 옛 생각에 잠기고 떨어지는 낙엽을 하나 줏어 보기도 하면서 나의 인생을 생각한다.
뭔가... 이루지 못하고만 과거의 일들이 이 때쯤엔 더욱 더 안타깝게 여겨지고 고향 생각에도 젖는다.
서울서는 대학 시절 도봉산 가은 곳으로 단풍구경이라고 핑계를 대고 남학생들과 어울려 등산을 하곤 했었다. 그때는 사실 단풍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을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출장으로 단풍 든 설악산에도 간 기억이 있으나 그 때의 일과 같이 갔던 사람들과의 재미있는 추억만이 남아 있다.
지금 내게 노오라 ㄴ단풍이며, 떨어지는 낙엽이며가 마음에 닿은 걱은 분명 인생의 가을을 어쩔 수 없이 인식해야만 할 나이 탓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렇게 감상적이 되는가.
출근 기차 속에서도, 북적대는 서브웨이 속에서도 우수에 젖은 여인의 모습이라도 흉내내듯 보던 책을 무릎에 놓고 멍청히 앉자있곤 한다.
얼만 전에 일로 잠깐 서울엘 갔을 때" 얘, 온김에 설악산에 가서 송이 먹고 가라. 간풍도 한창이라는데..."하는 친구들을 보며, 우리가 어느 새 이렇게 팔자 조은 여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는지 했다.
가을이니 한국에 온 김에 함께 옛날처럼 멋있는 연극이라도 구경하고, 동숭동 찻집에 앉아 커피향 속에서 옛 일을 이야기 해보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송이 버섯 먹으로 가자'고 하는 그 ㅈㅇ연 아주마들이 바로 내 또래라는 것이 더욱 나의 인생의 가을을 강조해 주었다.
여기서도 교포 여행사들이 뉴욕 북쪽지방으로 단풍놀이 관광 들을ㅇ 마련하고 있어, 특별히 외출이나 여행을 하기 어려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다.
아직은 단체관광으로 단풍놀이 갈 마음은 전혀 없다.
송이버섯은 못 먹어도 어디고 온갖 빨간색과 온갖 노란 색으로 물든 나무들을 보면서, 비처럼 우수수 흩어지는 낙엽 속에서 이번 가을은 더 늙기 전에 한번 센치하게 지내보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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