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31, 2015

씨 없는 수박

씨 없는 수박


씨 없는 수박은 어디에서 싹이 튼 것일까? 
씨가 없는데 어떻게 씨를 받아서 땅에다 심었을까? 생물시간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꽃과 식물에는 씨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모래알 보다 작은 양귀비 씨에서부터 아보카도 처럼 크고 둥근 씨까지 지구 상의 모든 식물에는 온갖 모양의 씨가 있다. 씨 없는 수박도 잘라 보면 되다 만 작고 물렁한 하얀 씨가 몇 개는 들어 있고 씨가 있어야 할 자리에 흔적이 남아 있다. 어떻게 해서 씨 없는 과일이 생겼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여름 방학 그림 일기장에 자주 등장한 것이 수박이다. 도화지에 꽉 차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을 빨간색 크레용으로 칠한 다음에 듬성 듬성 까만 씨를 그려 넣으면 영낙없이 달고 시원한 수박이 된다. 그 밑에다  ‘오늘은 수박을 먹었다. 참 맛이 있었다.’만 써 넣으면 밀린 숙제가 쉽게 채워지곤 했다. 
뱉어 낸 수박 씨는 씻어서 말려 놓는다. 입에 넣으면 매끄러워 지는 씨를 어렵게 이로 까서 먹던 고소한 수박 씨는 빼 놓을 수 없는 여름철 군겆질이다.
언제부터인가 수박을 잘랐을 때 씨가 꽉 차있으면, '에이구 잘 못 샀네 .'한다.  포도도 마찬가지다. 씨를 빼 내기가 귀찮아 진 소비자의 심정을 어느 생물학자가 그렇게 잘 파악을 했을까. 포도알에서 씨가 씹히면 짜증을 낸다. 만약 바나나를 한 입 깨물 때마다 씨가 씹힌다면, 그래서 줄줄이 박혀있는 씨를 일일히 골라 내어야 한다면 그것을 견뎌 낼 사람이 있을까? ‘맛있으면 바나나.‘ 역시도 원래는 씨가 있었다고 한다.  
한약제로 행인杏仁이라고 하는 살구 씨의 인仁자에는 인자함이라는 뜻과 함께 새롭게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든지 인자함을 베풀 때 그 원인을 따져 보면 긍국적으로는 타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다다른다. 
생명은 씨에서 비롯된다. 씨를 인자한 마음으로 보호해야 새롭게 생명이 탄생된다. 그 씨를 귀찮다고 없애 버리면 그 옛날 궁궐의 내시와 뭐가 다를까. 그러니까 씨 없는 과일은 불구 과일이다. 씨가 없는 과일을 선택하는 것은 인자함이 결여된 나의 탐욕이라고 비약해 본다. 유전인자를 변형시켜 가며 만들어 낸 음식물이 우리 몸에 해롭다라는 연구가 이미 나오고 있다.
건강하게 살려면 ‘어머니의 할머니가 알아 보지 못하는 음식은 먹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내 어린시절에 없었던 식품은 멀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수박을 살 때는 꼭 삼각형으로 껍질을 잘라 보고 빨간 색을 확인하고야 샀었다. 색이 빨갛다는 것은 잘 익었다는 것이고 잘 익었으니 달다는 걸 안다. 요즈음은 수박 뿐아니라 마켓에 나온 과일은 다 잘 익었고 달다. 꼭 설탕을 친 것 처럼 단 것도 있다. 이것 역시 어느 과학자가 씨에다 무슨 조치를 취했을 것이 틀림 없다.  보라색 고구마, 노란색 토마토 처럼 먹거리가 가지 각색으로 변하고 있다. 
태초로 부터 이어져 오는 씨가 몇 만년을 지내며 자연스럽게 바뀌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초적 입 맛과 눈 요기를 위해 억지로 조작해 만들어낸 식물들이다. 
최근에 온 세계가 ‘자연,자연’ 하는 그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손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스런 Natural한 상태가 자연Nature인 것이다. 사람이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의 정 반대이다. 억지로 만든 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가 우리들은 억지스럽고 부자연 스러운 것에 아무런 저항감을 갖지 않은다. 오히려 그런 것을 더 좋아한다.
씨 없는 포도를 집으려던 손을  멈춘다. 자로 잰듯이 똑 같은 크기의 과일 패키지에도 의심의 눈 길을 보낸다. 좀 구브러지고 못 생겼더라도 가까운 농장에서 키운 호박과 오이를 사야겠다. 
씨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수박을 살 것이다. ‘오늘은 씨 있는 수박을 사왔다. 참 맛이 있었다.’ 어린시절의 그림 일기를 살짝 고쳐써본다.




하이라인

 하이라인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층계를 돌고 돌아 올라갔다.

 "세상에......" 눈 앞에 딴 세상이 벌어진다. 뉴스로 떠들석했던 '하이라인'이다.

하이웨이에서 맨해튼 시내로 접어 들면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 지른 시커먼 육교를 가끔 바라보기는 했어도 직접 올라가 본 것은 한참 후였다. 어느날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에도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던 여름 날 하이라인을 보러 훌쩍 집을 나섰다. 러시아워도 지난 하이웨이는 조용했고 30분 만에 도착을 했다. 맨해튼에서는 금싸라기 같은 파킹 장소도 많았다.

'아하 이거였구나.' 주홍 빛이 얼룩진 하늘이 배경인 무대 위로 올라 선듯하다. 극장 속 웅성웅성 관객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아니 관객들이 아니라 무대 위의 배우들이다. 한 발짝 무대 속에 들어 서니 기차길을 따라 격렬한 하루를 마감한 도시가 통 째로 옮겨진 듯하다.

하이라인에서 바라다 보는 건물사이로 문득문득 드러나는 허드슨 강은 검붉은 노을 아래 검푸르게 번쩍이고 있다. 철로 옆에 무성히 자란 잡초들은 잡초가 아니라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심기어 진 설치 미술이었고, 매끈하게 디자인 된 벤치는 젊고 늙은 뉴요커들이 연극 배우 처럼 앉아 있다. 공중에 만들어 놓은 산책로 정도일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하이라인은 퍼포먼스의 장소이다. 

세계 각국에서 광관 온 사람들과 그들을 안내하고 있는 사람들, 어쩌다 한번 구경 나온 사람과 심심하면 한번 씩 올라 오곤 하는 사람, 우리처럼 생전 처음 와 본 사람들까지 온갖 모양의 사람들이 좁 다란 철로길을 메우고 있다.  

뉴요커들 참 대단하다. 낡고 헌 창고와 공장들이 즐비하던 하이라인 근처는 금 싸라기 땅이 되었다.가난한 주민들을 쫓아 내고 ‘센트럴 파크'를 만들어 센트럴 파크 이스트며 센트럴 파크 웨스트 땅 값을 올리더니 이제는 버려진 철도를 이용해서 또 다시 세계적 명소가 된 공원을 만들어 내고는 건물 값을 하늘 높이 올려놓았다. 
수십년 전에 운송기차가 달리던 하이라인의 양쪽으로 ' 기차길 옆 오막살이'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영화 웨스트 사이드의 진정한 웨스트 사이드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하이라인이 끝나는 34가까지 걸어갔다가 숨을 고르고는 되돌아 걸어서 아까 올라 왔던 입구로 내려왔다. 모처럼 나온 김에 들릴 곳이 한 군데 생각이 났다.
첼시 마켓이다. 20 여년 전 하이라인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시기다.
나비시코 비스켓 공장 자리에 생긴 진귀한 싼 물건 파는 가게가 들어서 있던 첼시 마켓을 우연히 알게 되고는 친구들이 오면 데리고 갔던 곳이다. 거기서 산 99센트 짜리 머그는 아직도 애용하고 있다. 늦은 시간인데도 와글거리는 첼시마켓 역시 완전히 달라졌다. 최고급 상점과 와인 바가 있는 또 하나의 관광지가 되어있었다. 
부엌용품 가게엘 들려 같으면 절대로 사지 않았을 16달라 짜리 거금의 병 마개 따게 하나를 샀다. 하이라인으로 기분이 올라가 있었던 탓이다.

하이라인을 또 한번 떠들석하게 한 휘트니 뮤지움은 또 얼마나 근사할까. 한참 후에나 한번 가볼 생각이다. 다음 번 하이라인 방문에는 휘트니 뮤지움이 주인공이 될 것이다.

Friday, January 30, 2015

꿈 속의 섬나라

제주도 팬팔 소년
                                                                                                                                

제주도 남학생이랑 팬팔을 한 적이 있다
여학생들이 백마 타고 오실 왕자님을 기다리던 그 시절, 팬팔은 선남 선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넷트워크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팬팔을 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 경관으로 뽑히기위해서라면 한 줄이나마 거들어 보려는 애국심으로, 얼핏 떠오른 것은 제주도에 출장갈 챤스를 포기했던 일이다. 그걸 쓰려고 했다. 그런데, 컴퓨터 화면에 클릭해 놓은 하얀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팬팔 사건이 생각났다. 비밀을 들킨 것 처럼 흠칠 놀랐다.

나의 꽃다운 청춘을 바쳤던 '조경공사'시절 출장이야기가 아니라, 10대 어린시절의 팬팔이라니... 하긴 매일 야근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샅샅이 뒤 엎고 개발하던 이야기보다는 팬팔이야기가 더 좋을 것도 같다.

분명 용돈을 애껴 사보던 학원잡지에서 그 주소를 찾았을 것이다. 아마도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사는 진명여중 1학년 여학생이예요.' 써서 보냈을 것이다. 당연히 한 두번 편지가 오고 갔을 것이고 곧 이어서 편지 속에 동봉해 온 모자 쓴 남학생의 흑백 사진! 얌전한 그 인상이 가물가물하면서도 선명하다. 그런데 그 뿐이다. 사진을 보내 온 남학생 이외에 아무런 감정이 따라 오질 않는다. 확실한 건 사진을 받고 난 후 그 팬팔이 끝이 난것이다.

지금이라도 타이타닉 선박의 그 곱상하게 늙은 할머니 처럼 뭔가를 회상하는 이야기를 좀 엮어보려 해도 안돼는걸 보니 그야말로 어린시절 한 순간 소꼽놀이도 아니었던가 보다. 제주도 남학생이 성급하게 사진만 보내오질 않았어도 어쩌면 편지가 좀 더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왜 그 남자애는 그렇게 급했을까? 왜 자기 사진을 보냈을까. 자기 얼굴에 자신이 있었나 보다. 아니면 얼마나 육지와 연결이 되고 싶었길레 그랬을까. 

, 그러나 나는 사진을 받고는 편지를 끊어 버렸다. 꼬제제한 남학생의 모습에서 기분이 상해 버렸을거다. 그 다음 보내는 답장 속에 은근슬쩍 내 사진도 보냈었으면 지금쯤 타이나틱은 아니라도 한 보따리 쯤은 풀어낼 말이 있을텐데

21세라는 나이로 들어간 회사에서 나는 설악산, 무주구천동 같은 국립공원에 벤치와 가로등을 디자인하고, 경주 보문단지다 대전의 대덕 과학공단이다 종횡무진하며 일을 했다. 건설부에서 시찰이 나오면 뿌리 없는 나무를 꽂아 놓는 한이 있더라도 날짜를 맞추느라 야근을 해야 했다. 제주도 중문단지팀에 들어 갔을 무렵 대학원을 졸업했고, 1당 백을 하던 일에 지쳤던 나는 제주도 출장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 두었다.  “미쓰 노, 제주도 출장을 다녀와서 사표 내도 될텐데.” 하는 동료의 말에 뭐 제주도야 아무래도 가게 될텐데요.였다. 즉 신혼여행말이다

그 후 한참 만에 뉴욕에서 결혼을 했기에 제주도는 이루어지지 못한 먼 섬나라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 애들 어릴 때 즐겨 불러 주던 자장가가 바로 '섬마을 아기'였다. 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아기를 두드리며 '스르르 잠이 듭니다'를 반복해서 부르곤 했다.



굴 따러간 엄마를 그리다 잠든 제주도 아기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바다가 불러주던 자장 노래에 스르르 잠들던 그 패팔의 남자 아이는 언제나 육지로 나가고만 싶었을것이다그래서 용기내어 학원 잡지 팬팔 난에 이름을 써냈다드디어 꿈에 그리던 편지가 날라왔을 때 그것이 여학생의 편지였으니…… 

빛 바랜 명함판 사진. 그 어린 순진한 섬 마을 남학생 얼굴을 두고 장이모 감독이라면 누구라도 아련히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 하며 가슴 뭉클할 장면을 연출했겠지공지영 씨라면 속절없이 속을 태울 소설을 썼을테지. '시'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이라면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평범한 얼굴들로 마음을 저며내는 영화한편 만들었으리라.


파도소리에 잠 들던 그 팬팔 소년이 끝끝내는 중문 어느 멋진 호텔 주인이 되어 있다면? 수줍은 표정을 간직한 호텔 왕 백만장자. 누군가와 우연히 오고 가던 말이 이어져서 결국 둘이는 만난다. 꿈에 그리던 서울 여학생'을 만난 은발의 팬팔 소년. 곱게 늙은 여학생. 그때 부터 뉴욕과 제주도를 오가는 이메일이 시작된다면? 소설을 써 보려다가 만다.

아니다. 그 시시한 팬팔은 아무리 애국심에서라도 애써 엮어 볼 일은 아니다.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탄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 길을 달려 옵니다."의 모성이 아이들을 집에 두고 회사를 다녔던 내게는 더 가깝다.
이제라도 남편이랑 구혼여행으로 세계 7대 경관 제주도에 가서 30년 넘게 살아 낸 서로를 도닥거려 주고 싶다.  



(2011년 세계 자연보호지역 선정을 위한 캠페인)

엄마랑 밥 먹으러

지난 봄에 다녀오고 6개월만에 다시 어머니를 보러 한국에 갔다.
내 엄마를 보러 가는 일이 이렇게 번거러울 줄을 왜 미처 몰랐단 말인가. 내가 두 째 아이를 낳았을 때 뉴욕에 처음 오신 이 후로 몇  년에 한번 씩은 뉴욕엘 오셨고 나도 몇 년에 한 번은 한국엘 가곤 했다. 그러나 칠순이 넘자 비행기 타기를 싫어 하셔서 어머니를 보는 횟수가 줄어 들었다. 
내가 한국에 한번 가는 일이 쉽지가 않다. 뱅뱅 도는 일상에서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려운 일일 뿐더러 비행기 값은 또 얼마나 비싼가. 
그나마 몇 가지 일을 겸사해서 한국엘 가면 어머니한테는 '나 왔어.' 하고는 내 볼일로 돌아다니다 오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머니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로워 졌다. 갑자기 늙어 버린 것 같은 어머니의 얼굴 말이다. 지난 번 봤을 때 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모습이다.
인천 공항에서 셔틀 버스를 타고 목동에 내려서 짐을 끌고 어머니 아파트 문 앞에 당도한다. 최신식 자물장치 번호를 누르면 안에서 급히 슬리퍼끄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마자 현관 앞에 서 있는 어머니에게 반갑게 '엄마' 해야 하는데, 그것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어머니 역시도 금방 '우리 노려.' 하지를 못 한다.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 신발을 벗으며 '이젠 자주 한국엘 와야지' 속으로 다짐을 했었다. 그 다짐은 다짐일 뿐, 순전히 '엄마보러 한국 가기'가 쉽질 않았다. 나는 왜 미국에 와서 살게 된 것일까. 오랜 만에 보는 어머니의 늙은 모습을 보는 일이 싫어서라도 자주 한국엘 가야겠다는 것은 순전히 내 욕심이다.
어머니가 팔순을 넘기셨을 때야 큰 맘 먹고 '엄마랑 밥 먹으로' 한국엘 갔다. 그 때만 해도 걸음이 불편한 어머니와 버스를 타고 남대문 시장도 가고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 세종대왕 구경도 갔었다.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1년 만에 다시 갔을 때엔 지팡이를 짚기 시작한 어머니와 남대문 시장은 엄두도 못내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식당이나 가까운 백화점으로 샤핑을 갔다. 
1년 후 지난 봄에 갔을 때는 어머니 아파트 문 앞에서 가슴이 다 두근 거렸다. 어머니는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어머니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식당을 갈 때에도 중간에 두 세번을 쉬어야 했다. 동생 대신 약도 타다드리며 딸 노릇 잠깐 하고는 대책도 없이 “엄마. 나 가을에 또 올께.” 하고 돌아 왔다. 정말로 핑계 될 일이 없어 막막하던 중에 마침 잡지사 일꺼리가 생겼다. “여보. 엄마도 볼 겸 한국엘 다녀 와야겠네.’하고 허락을 받았다.
새벽에 인천 공항에서 동생에게 카톡을 하니 “엄마가 밤 새 잠도 안자고 기다리고 있다구.” 동생도 잠을 못 잔 듯하다. 셔틀 버스에 앉아있는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 “오마니, 나 왔시요.” 하고 현관엘 들어서는데 어두컴컴한 현관에 서 있는 어머니의 실루엣이 폭삭 작아져있다. 6개월 만인데도 어머니가 좀 더 어눌해 져 있는 것이 보였다.
수선을 피며 그 옛날 어머니가 미국 오시면 사드리던 우리 동네 중국 식품점의 월병과자를 꺼내자 어머니는 ‘야~ 그거 맛있는거.” 애들 처럼 좋아 하신다. 
그 옛날엔 딸이 한국에 오면 아침부터 한우를 사다가 구어 멕이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딸이 아침에 시금치 국 끓이고 어제 먹던 닭고기 다시 데우고 하는 걸 보며 TV 앞에 앉아서 기다리신다. 점심에는 자장면도 시켜 먹고 동생이 쉬는 날엔 멀리 냉면 먹으로도 갔다. 이렇게 2주일을 지내고 또 별 대책 없이, “엄마, 내년 봄에 또 올꺼야.”하고 왔다.
궁리를 해본다. 매일 매일 일하는 남편을 혼자 두고 가는 것도 그렇고 하루 하루 늙어만 가는 어머니를 두고 멀리 있는 것도 그렇고 ...... 남들은 놀러 다니기도 잘 하는데, 엄마랑 밥 먹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내 자신에게 화가난다. 왜 좀더 열심히 잘 살지를 못했단 말인가.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친정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할텐데. 엄마 찾아 삼만리 길이 멀기만 하다.


언니 노릇

언니 노릇


어머니 집에서 20분 쯤 걸어가 지하철 9호선을 타고 고속터미날에 내려 3호선으로 갈아 타고 다시 2정거장을 더 가서 내리면 역 앞에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셔틀 버스가 있다고 했다. 동생이 퇴근하고 온 다음에 서두루지 않고 떠나도 될 만했다.
다만, 고속 터미날 역에 그렇게나 사람이 많고 전철을 갈아 타러 가는 길이 그렇게 먼 줄을 몰랐다. 또 셔틀 버스가 예술의 전당 정문 앞이 아니라 맞은 편에 설 줄도 몰랐다. 인터넷을 보며 계획한 예술의 전당 내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8시 공연엔 좀 빠듯했다. 동생이 ‘언니, 이 앞에 순두부 잘하는 집이 있다는데, 거기서 저녁 먹을까?’한다. 그러면 우리의 우아한 밤의 분위기가 깨진다.  “아니야. 모짜르트 카페로 가자.” 예술의 전당안 깊숙히 자리잡은  '모짜르트 카페'를 찾아갔으나 30분을 기다리라고 할 줄은 기대 못한 일이다. 우리는 예술이 전당 안에 있는 또 다른 레스토랑인 '카페 벨리니'를 향해 온 길을 되돌아 뛰다시피 했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랑 30년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동생을 이번에 한국 가서는 근사하게 대접해 주고 싶었다. 잘 사는 나라 미국에 갔으면 비단 구두라도 사 갖고 올 줄 알았던 언니는 어쩌다가 한번 씩 한국에 와서는 손님처럼 여기 저기서 얻어 먹기만 하는 철부지였을 것이다.  항상 어머니에게 촉각을 세우고 사는 동생과는 푸근히 이야기도 하지 않고 한 열흘 머무는 동안 온통 친구들을 만나느라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훌쩍 미국으로 가버리곤 하는 야속한 존재였을 것이다.
한국엘 가면 공항에서부터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면서부터 마음이 풀어진다. 미국서 긴장하고 살던 어리광을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마음 껏 풀어 놨을 것이 틀림없다. 친정 어머니로 부터는 귀빈 대접을 받고 동생들로부터 고추가루며 된장에 조카에게 주라는 금일봉까지 받아들고 배터리를 팽팽하게 충전해 갖고 오곤 했다.
동생은 오랜 세월을 그런 나를 입 다물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뒤 늦게 철이 들었는지 그 동안 못 했던 언니 노릇을 하고 싶었다. 86세 어머니가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는 것 만큼 동생의 어깨가 늘어 지는 것이 보인다. 멀리 강남 사는 막내 동생도 아이들 대학 입시 뒷바라지에 친정 어머니 발 노릇까지 하느라 잠이 모자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런 동생들에게 어떻게 언니 노릇을 할 수 있을까.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음악 좋아하는 동생들을 음악회로 초대하자는 것이었다. A석 좌석에 멋진 저녁식사를 포함한 근사한 초대말이다. 갈 만한 공연을 찾았다. 때 마침, 이민 초기에 같은 교회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임헌정 씨가 지휘를 하는 음악회가 있었다. 안타깝게 수능시험 보는 딸 때문에 막내 동생은 빠졌지만, 우리끼리라도 하루 저녁을 즐기자는 데에 목동 동생은, 자기도 예술의 전당은 처음이라며 순순히 따랐다. 
그 옛날 대한극장이나 세종회관엘 갈 때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목동 가로수 길에 푹석하게 깔린 프라타나스 낙엽을 밟으며 동생이랑 고속터미날 역으로 걸어가는 나는 더 이상 한국에 온 손님이 아니었다. 사람이 꽉 찬 전철 안은 옛날 만원 버스 타던 기분이었다.
카페 벨리니에서 레드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계획했던대로 우아한 식사를 했다. 컨서트 홀에 에 도착해 안내를 받으며 무대 앞 가운데 자리에 앉고 나니 박수를 받으며 지휘자가 등장했다. 매주일 만나 맥주 마시며 놀던 지휘자에게서 지난 그 세월이 한꺼번에 풍겨왔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는 동생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고 있다. 지루할 줄 알았던  브르크너의 교향곡 한음 한음이 지휘자 손 끝을 따라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열열한 박수를 수 차례 받으면서도 끝내 앙콜 곡을 연주하지 않은 지휘자를 찾아 무대 뒤로 갔다. 
임헌정 씨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그냥 가려고 했지만 하도 지휘를 잘하셔서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요.”했다. 반가움을 교환하고는 아무 기약없이 헤어졌다.  
우리는 9호선을 타고 목동에 내려 또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늦 가을 싸늘한 어둠 속을 터벅터벅 걸으며 “언니, 언니….”  털어 놓는 동생의 넋두리에 ’그래, 그래.’하는 내 마음이 젖어든다. 엄청난 세월과 못다한 이야기들이 브르크너의 오케스트라 곡처럼 불협인듯 조화를 이룬다. 
“야. 어디 네 바이올린 좀 들어 보자.”
아버지가 밤 늦게 사오신 구운 옥수수 알맹이를 한 이불 속에서 너 한알 나 한알 세어 가며 먹던 동생. 내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타주던 내 동생이다. 우리 늘 이렇게 좀 살아야 하는 건데…..





열성

열정적인 여인


참 이상해요. 뻔히 알면서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 못하고 그냥 이중생활을 하게 되더라구요. A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긴 터널을 뚥고 나왔다’고 표현했다. 그 터널은 A의 종교였다. 
우연한 기회로 두 세번 만나본  A는 나에게 책 한권을 빌려 주면서 가깝게 다가왔다. 첫 인상이 웬지 여학교 때 친했던 친구를 생각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하며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밤새 읽은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앞 자리에서부터 내게 달려 오던 정열적인 친구다. 각각 다른 대학엘 들어간 첫해 여름 방학에 해변에 같이 놀러갔을 때 그애는 거기서 만난 남학생이랑 연애를 하고 대학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다. 자연히 나와는 멀어져 버렸지만, 아직 이 친구의 흔적은 강하게 남아 있다.  
A 가 보라고 준 책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해서 '지금 이대로가 좋다. 그냥 그대로 편하게 살라'는 내용이었다. 내 맘에 들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어느 교회를 오래 다니다가 고민 끝에 나왔다는 A와는  ‘진리가 뭔가’ ‘ 신이 뭔가’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러웠다. '정치얘기와 종교얘기는 될 수록 피하는게 좋다.'라는 생각 때문인지 내 주변 사람들과 마음 놓고 쉽게 나눌수 없는 대화이다. 그래서 A씨와의 만남은 재미있었다.
‘아아, 그러시군요.” ”네에, 그렇지요.’ 진지한 A씨에게 나도 모르게 간증처럼 나의 인생관을 늘어 놓기도 했다. 매사에 덤벙 뛰어 들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녀가 겪었다는 종교적 고통을 시시콜콜 물어 보지 않았다. A 씨도 자기이 과거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좁다. A가 다녔다는 교회가 이단이라고 하는  종교단체였다는 것을 남을 통해 들었다. 분명히 A는 자신이 교회에 혼신을 다했었다고 말 했었다. 그리고는 우울증에 걸렸고 답을 얻으려고 사방을 헤매다가  한국에 가서 비로서 내게 빌려줬던 그 책의 저자를 만나, <이대로가 좋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었다. 
그 다음번  만났을 때 ‘OOO 라는 곳의 교인이셨다면서요?’ 라고 물어봤다. 그녀는 숨겨둔 비밀이 밝혀진 것에 너무 놀라서 오히려 아무런 표정도 할수 없는것 처럼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며 서서히 고개를 끄덕했다.  괜히 말했나 싶었다. 이제는 그런걸 다 겪어내고 도가 튼 사람이려니 했는데, 굳을대로 굳어진 그 얼굴을 바라보기가 미안했다. 털 빠진 채 길가에 떨어져 비를 맞고 있는 참새가 연상이 되었다. 너무도 나약해보였다,  낚시 밥을 스스로 입에 물어 버린 소설 속의 여주인공같았다. 
잠시 아무 말도 않던 그녀는  ‘ 그동안 아주 길고 긴 깜깜한 터널을 지나온 것 같아요.’라며 자기모순의 정신적 고통을 털어 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생각했었다고 한다. 아직도 그 교회에는 이게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말을 못하고 그대로 살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고 했다. 속속들이 가식으로 꾸며진 것을 훤히 알면서도  앞서서 벌거벗은 임금님 옷이 근사하다고 아우성을 친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자기 얼굴에 가면을 쓰고 말이다.
순진무구했던 A는 "야, 저것봐라. 임금님이 벌거 벗었다아~." 외친 어리 소년이 된 것이다. 그러자니, 그 군중들 앞에서 털도 뽑혔으리라. 그 아픔들을 진리 추구의 정열로 버텨냈는가 보다. 이 점 마저도 여학생들의 참새같은 수다보다는 어려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던 사춘기 시절의 내 친구와 비슷했다.
그 여학교 때 친구가 독실한 불교신자가 된 것을 40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좁은 세상임을 느끼며, 불교 열성신자인 외사춘을 통해서 그 친구와 국제 전화로 연결이 되었다.  ‘언제 한번 만나야지’ 환갑이 다 된 친구의 목소리에서  커다란 눈에 꼭 다문 입을 한 자그마한 체구의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구나. 그 열정으로 어느 절의 보살님이 되었구나 했다.  
‘진리가 바로 내 안에 있으며, 지금 이 대로에 만족하고 더 이상은 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를 터득했다는 어느 날 이 동네 개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 녀을 알게 된 지 한 반년 쯤 후였다. 그러더니 또 한 반년 후엔 권사 안수를 받았다고 했다. 대화의상대가 없어진 때문인가 왜 A에게 실망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실망스러웠다. 또 한번이 실망은 그 후로 1년도 못 되어서 왔다. 장로님과의 갈등으로 목사님이랑 함께 그 교회를 나왔다는 것이다. 아하. 열정이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 돼는 정열이다.
하긴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들의 생각을 바꿔보고자 열성(zealot)으로 사셨나. 석가모니는 말 할 것도 없고. 열성이 없는 나같은 중생은 렇게 뜨뜨미즈근 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또 다시 그 습하고 어두운 터널을 걸어서 나올 A와 차를 마시면서 진리가 뭔지 인간이 뭔지 하나님 뭔지 왜 사는 건지에 대해서 답이 없는 이야기를 나눠 보고는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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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커피 맛

자판기 커피



열 살 쯤 때 이미 아버지가 마시던 커피 맛을 본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를 마시며 일생을 살아 오고 있다. 임신을 했을 때에도, 한잔 쯤이야….하면서 마셨다. 커피 맛도 무척이나 가린다. 입맛이 까다로워서가  아니고, 내 입에 익숙한 커피 맛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코에 닿는 향내와 함께 한 첫 모금이 기다리던 맛이 아니면 실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작은 커피 잔에 타 주는 달고 쓴 다방 커피 밖에 없던 한국에서도 미제 커피를 구해 마셨고, 나중엔 맥심 커피 가루에 프리마와 설탕을 살짝 타서 베이지색 커피를 만들어 마시곤 했었다. 더 연하지도 진하지도 않은 나만의 베이지색이다.
미국에 온 다음날 처음 마신 커피는 친구가 끓인 커피에 우유를 듬뿍 넣어 항아리만한 머그에 가득 부어준 것이었다. 차차 그 슴슴한 커피에 익숙해져 갔다. 수 많은 미제 커피를 종류별로 마시다가, 한 때는 비싼 원두 커피를 주문해 시간과 돈을 쓰며 커피 맛에 공을 드리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콜롬비안 커피인 던킨 도너츠 커피에 안착을 하고 나서는, 던킨 도너츠를 찾아 멀리 운전해 갈 지언정 스타벅스 커피는 싫어했다. 던킨 커피에도 꼭 액체 크림을 넣어야 내 맛이 된다.  종업원이 실수로 우유를 넣어 주거나 설탕을 넣어주면 그 실망이 너무 크다. 정해 놓은 커피 맛으로 인해 인생이 자유롭지가 못했다. 커피 중독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한국 방문 때 마다 커피가 큰 문제가 된다. 도착 다음날 부터 커피가 없는 어머니 집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지하철 입구 자판기에서야 그날의 첫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이 때는 쓴맛 단맛을 가릴 형편이 아니다. 카페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생 집엘 가면  ‘언니가 좋아하는 커피 색이 이거지?’ 버버리 코트 색보다 살짝 더 밤색을 띤 내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타주어서 감격하며 마시곤 했다.
한 열흘쯤 한국에 머무는 동안엔 오직 카페인 섭취에 그 뜻을 두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나를 위해 어머니가 미리 사다 놓는 봉지 커피와 자판 커피에 익숙해져 갔다. 도착 다음날 아침, 봉지 끝으머리의 설탕을 꼭 잡고 타도 달착지근하기만 한 커피 한잔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밤 사이에 나라가 바뀌었음을 즐긴다.
얼마 전부터는 한국에 갈 때 마다 서울거리 구석구석에 카페가 늘어나는 것을 본다. 비슷비슷한 카페가 하도 많아서 어느 길이 어느 길인지 혼동 할 정도다. 커피가 비싼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 곳곳에 있는 던킨도너츠 커피에는 미국에서 넣어 마시던 크림이 없어서 싫다.
다행히도 서울 어디에서나 봉지 커피와 자판기 커피가 오랜 친구처럼 나를 맞는다. 지하철 역이나 식당 뿐 아니라 웬만한 사무실에는 봉지 커피나 자판기 커피가 있다. 
커피 입맛이 태평양을 건너면서 자연히 로밍이 되는 가보다. 식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올 때면 의례히 앙증 맞은 종이 컵에 쪼로록... 약간의 거품을 내며 반쯤 담기는 커피를 뽑는다. 먼저 어머니한테 건네 주고 나서 내 것을 뽑아 입에 가져가는 그 순간이 즐겁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홀짝홀짝 마시는 따끈하고 달콤한 커피는 느긋하게 부른 배 속에 깔끔하게 맞춤표를 찍어 준다.
요즈음 뉴욕 한인 타운 뿐 아니라 맨해튼에 한국의 ‘카페 베네’가 진출을 해 우후 죽순으로 퍼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리운 것은 멋쟁이 커피가 아니라 자판기 커피이다. 뉴욕의 카페 베네에 자판기 커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날이 달라지는 한국이라서 언제 또 이 자판기 커피 마저 없어져 버릴까 쓸데 없는 걱정까지 한다. 
차라리 커피 중독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이름 석자

한국 이름 석자


한국 이름에 무슨 죄가 있을까. 하이웨이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한국 여학생이 아무런 항의도 못하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이 이름을 받아 적자마자 다짜고짜 수갑을 채우더라는 말을 해주던 학생의 어머니는 오래 전 일이었는데도 분을 이기지 못했다. 사고 현장에서 어깨를 다친 딸의 팔을 뒤로 제끼고 수갑을 채운 것을 말할 때 울먹이며 "그러게, 첨에 미국 이름을 지을걸 그랬어요." 한다.  
경찰이 지명 수배된 한국 이름으로 혼동을 했다는 건데, 실수라고 하기에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름이 헷갈린 경찰의 실수를 완전히 나무랄 수 만은 없다.  나 역시도 우리 한국 이름을 자주 혼동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잘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청첩장을 받았다. SANG HYUN CHUNG과 JEONG SOON PARK 이란 이름으로 초대를 하는 HYUN SUN BYUN 과  SOON HO CHUNG 의 결혼을 알리는 카드를 읽으며, 정신이 다 없었다. 누가 누구인지 어떤 연관관계인지를 살펴보는데 한참이 걸렸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름 석 자에 분명 죄는 없다. 있다면 혼동이 있을 뿐이다.
미국 사람의 성과 이름은 뚜렷이 구별된다. 남자 여자 성별도 확실하다. MARY, SUSAN, JENNIFER 는 분명 여자이고  JOHN, PETER, WILLIAM는 절대적으로 남자이다. Arnold Schwarzernegger과 Arnold Palmer가 뚜렷이 다르다.
그러나 한국 이름은 이름First Name과 성Last Name의 구별이 애매하고 모두가 서너개의 짧은 단어로 이루어진다. 남녀의 구분도 불 분명하다. 하이웨이의 그 경찰도, 한국 이름에서 성별이 분명했어도 수갑을 채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Jung Young Kim 이란 이름을Jun Young Kim,  또는 Kim, Yong Jung 아니면 Jung Young Min과 혼동했을 것이다. 한국인 눈에도 어려운 데 하물며 미국사람 눈에야 오죽 더 할까.
신문 기사를 쓰다보면 한국이름을 영어로 써야 할 때도 있고, 영어로 된 이름을 한국이름으로 바꾸어 적어야 할 때가 종종있다. '정혜'를 어떻게 영어로 번역한다면 Jeong Hye, Jeong Hae, Jeong Hea, Jung Hye , Chung Hye, Jung Hae, Chung Hae, Chung Hea. 수학의 순열문제를 푸는 식이다.  예전에 한문자를 놓고 따지던 심오한 뜻은 온데 간데가 없이, Jung이냐,Joung이냐 Chung이냐, Jeong이냐를 놓고 고민을 한다. 반대로 Hea Suk이란 이름을 한국어로 바꾼다면 혜숙, 혜석, 해숙,해석, 희석, 희숙......끝이 없다. 약자가 끼이면 더 복잡해 진다. Sung H. Kim이란 이름을 보자. 김성훈, 김성호, 김성희, 김성혜, 김성환, 김승호, 김승희, 김승훈, 김승환, 김승혜, 김성화, 김승현, 김성회, 김승헌, 김성한.....한이 없다.
미국식으로 지은 이름도 김,이, 박 성과 함께 쓰여지면 마찬가지다.  내가 알고 있는 마이크 리, 데이비드 킴, 수잔 박, 제니퍼 리가 서 너명 씩 된다. 또 한가지 문제는 David Lee가 중국인인지,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고민거리가 된다.
여자 이름에는 할 말이 더 많다. 이민 초기에는 미국식을 따라 남편 성을 쓰던 여성들이 뒤 늦게 자신의 성을 찾는다. 그래서 여자 이름만 보고는 과연 남편 성인지 자신의 성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최근 트랜드인 자신의 성과 남편의 성을 같이 쓸 때에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일 경우는 이해가 되는데, Yong Hee Park Choi, Grace Kim Lee… 어색하기만 하다.
근본적으로 우리말 영어 표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미국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푸산 Pusan을 부산으로 알 수가 없듯이 발음과 다른 영어 표기로 곤란을 겪는다고 한다. 우리 이름의 영어 표기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크게 다뤄져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요즘 태어나는 젊은 한인 가정의 애기들 이름에서는 희망이 보인다. 어느 집 손녀 딸의 이름이 예본Yebon이란다. 예수님을 본 받으라는 뜻이란다. 예진Yejin이는 예수님의 진리라고 했다. 한자로는 무슨 예자를 쓰냐니까 한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Jesus, 영어의 지저스나 스페인 어의 헤수스....그건 그 나라의 발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발음이 중요하다. 우리말로 의미있는 소리음 그대로를 영어로 표기한다는 참신한 발상이다. . 미래의 우리 이름이 한문이나 미국식 이름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나아갈 방향인것 같다. 


오바마 마마

오바마 마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무조건 힐러리 편이었는데 대학생 아들은 오바마의 책을 들고 다녔다. ‘흑인? 아직은 좀 이르지. 나이도 어린고.’ 하면서도 뉴스 마다 쏟아지는 오바마를 피할 수가 없었다. 후보 지명전이 치열해 질 무렵, 인종 문제가 은근히 팽팽해지고 흑인 목사를 두고 큰 파문이 일어나자 오바마가 깜짝 놀랄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이 겪은 흑인차별에 대한 연설을 했다. 
그 것이 내 마음을 바꾸어 놨다.
대통령 후보까지 오른 그의 한을 알 것 같았다. 뉴욕 타임즈 신문에 실린 이 연설문에는 수 천개의 독자 의견이 달려있다. 그 걸 하나 하나 읽어 보면서 마치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때와 같은 역사의 순간을 실감했다. CNN 뉴스와 YOU TUBE까지 찾아 다니며 오바마를 따르다보니, 힐러리가 뒷 전으로 밀려 버렸다. 
나는 오바마가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열번을 토하곤 했다. 흑인이 얼마나 한국 사람들을 질투하고 싫어 하는 줄 아냐며 “흑인이 대통령이 되면 신나서 더 우리를 깔 볼꺼예요” 라는 사람도 있었다. 미국에서 50년 넘게 사신 이모부도  ‘백인들이 흑인을 찍을 것 같으냐? 어림 없지. 오바마를 칭찬하다가도 투표 당일에는 백인을 찍을 것이다.’고 하셨다. 
그럴수록 이 문제가 미국에서 두 아이를 낳아 키운 나의 일로 다가왔다.  
아마 눈치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사람들로부터 대 놓고 차별을 당해 본 경험은 거의 없다. 하지만 어딜가나 무의식 중에 나의 얼굴을 의식하며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애들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일서 부터 한국인이라는 걸 염두에 뒀고, 학부모 회의나 학교 행사마다 나도 모르게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던 것이다.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로 확정이 되자, 우리 동네 잡지에 흑인들이 털어놓는 이야기가 특집으로 실렸다.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흑인에게 집을 안 팔았던 것은 물론이고 이 곳에도 흑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레스토랑이 있었다고 한다. 한 변호사는 자기가 수영장 물 속에 들어가자 백인 아이들이 기겁을 하고 나가길레 덩달아 같이 뛰어 나왔던 어렸을 때 일을 회상한다. 
사실 요즘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한 젊은 흑인 아빠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스타벅스 갔는데 뒤에 선 백인 여자가 공손한 말투로, '우리 애가 당신 아이의 머리카락 좀 만져봐도 돼요?’라고 해서 단호하게 ‘NO’ 를 했다고 한다. 아직도 백인 동네에 사는 흑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다른 집에서는 생각도 못할 삶의 지침서를 써준다.
   학교에서 노래부르고 춤추지 말것, 
 거리에서 뭘 먹지 말 것,   
더워도 옷을 벗지 말 것,
티셔츠을 입지 말고 단추 달린 셔츠를 입고 다닐 것, 
백인 여자가 혼자 있는 엘리베이터는 타지 말 것,
  가게 안에서 어슬렁 거리지 말고, 껌 하나를 사도 꼭 영수증을 받을 것,
  운전을 하다가 경찰이 세우면 의자 밑에 있는 녹음기를 틀어 놓고, 무조건 순종할 것.
우리 아이들이 자랄 때는 동양 아이가 들어왔다고 백인 애들이 수영장에서 뛰어 나가는 시대는 아니었다. 특별 지침서를 써 주진 않았지만,얼 굴 색이 다르다는 편견을 당할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내 아이들 나름대로 편견을 당하며 자랐다는 것을 안다. 좋은 대학 나와  돈 많이 버는 직장에 들어 가기만 하면 이제 다 된 것이 아니다. 암만 미국인으로 살아도 아직은 그 들 앞에 두꺼운 벽이 가로 놓여 있다. 눈에는 안 보여도 절대로 뚫고 나갈 수 없는 글래스 월(Glass Wall)이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골이 깊은 인종 차별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브라함 링컨에서 버락 오바마까지 150년이 걸렸다. 버젓이 흑인 대통령이 있는 사회지만 아직도 백인 경찰들은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흑인을 무조건 쏘아 죽이는 일로 한창 시끄럽다. 오바마가 외친 '변화(Change)'가 언제나 실현이 되려나.
이제 막 사회의 일원이 된 내 아이들이, 투명한 벽에 부딪치지 않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오바마의 엄마나 어느 흑인 엄마의 마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스무 고개

스무고개


‘여보, 아까 H 마트에서 누굴 봤는 줄 알아?’
‘여자야 남자야?’
‘여자.’
‘교회 사람이야?’
‘응’
‘우리 교회? 팰함 교회? 브롱스 교회?’
"아니'
‘그래? 으흠. 스카스데일 사는 사람이야?’ 
질문이 길어진다.  문제를 낸 쪽은 네 아니오 만 한다. 답을 맞추어야 하는 자는 눈을 위로 뜨며 질문 하나라도 아끼려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우리 동네 보다 북쪽에 살아?” “세탁소 해?” 그렇다고 한다. 누군가 짚히는 사람이 있어도 일단은 안전한 범위로 좁혀 가야 스무 번 안에 정답을 낼 수 있다. 최근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지, 최근이라는게 1년인지 6개월인지 등등  질문은 점점 디테일해지고 질문자와 답하는 자의 표정은 심각해 진다. 몇 고개 남았는지 손가락을 헤아리다가 사람 이름 몇 번 지나면 ‘ 아하. 미세즈 리구나.’ 답이 나온다. 
띵.똥.땡. 긴장이 풀린다. "오늘 H 마트에서 미세즈 리 만났어.' 한 마디면 될 걸 머리를 싸메고 시간을 끌며 서로가 팽팽이 맞선다. 정답이 나오면 그 때부터 아까 미세즈 리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서부터 시작해 온갖 이야기가 벌어진다. 사실과 소문이 겹쳐진 인간 드라마다. 30년 미주 생활로 쌓여진 이야기가 미세즈 리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남편과 나의 취미가 다른 것은 일찌기 파악을 했고, 이제는 각자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아니까  시시한 일로 다툼하는 일도 별로 없다. 저녁 때 만나면, 별일 없어? 응 별일 없어. 그리고는 별로 할 말이 없다. 간혹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진보파 보수파로 갈라지니까, “알았다니까.” 적당한 선에서 말을 멈추곤 한다. 계속하다보면 극좌와 극우로 뻗어 버리기 일수 이다.
그러나 누가 먼저이든  ‘여보, 나 오늘 누구 만났게?’ 하면, 서로 눈이 반짝하며 마음이 통한다. 이름을 맞춰야 할 그 사람은 분명히 우리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인 것이다.  으흠.  잠깐만. 정색을 하며 ‘남자야 여자야?’하면서 실마리를 푼다. 그 옛날 라디오 ‘재치문답’이 시시할 정도다. 어디라구?  몇 시쯤?  혼자 있었어? 아니면 여럿이 있었어? 잘 안돌아가는 두뇌에 기름을 친다. '누구 만났게’로 시작되는 이름 맞추기 게임은 우리 부부에게 딱 맞는 오락 시간이 된 것이다.
몇 년 전만해도 한국 식당에 가면 꼭 한 두명 쯤 아는 사람을 만났었는데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꽉 찬 곳에서도  마치 내가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어디에서건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큰 뉴스꺼리가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부터, 심각한 것을 싫어 하는 남편이 먼저 ‘나 오늘 누구 만났게?’를 시작했다. 글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어디 한번 맞춰봐. 당신도 아는 사람이야." 했다. " 아마 누군지 알면 깜짝 놀랄꺼야." 남편이 미끼를 던진다. “그래? 누굴까. 아, 힌트 좀 줘야지 알지. 뜬금 없이 누군 줄 알겠어. 남자야 여자야?" 
요즈음은 누가 먼저이건 "나 오늘 누구 만났게'를 하면, 일단 상대방 얼굴 살피며 질문을 아낀다. 남자야 여자야? 이런 시시한 질문은 피한다. 가능한 모든 상황을 심사숙고해 본다.  머리 속으로 재빨리 우리가 아는 사람의 목록을  둘친다. 침묵이 흐르면 " 아ㅡ 빨리 말해봐." 재촉이 온다.
탐정 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두 세번 고개를 넘으면 남편의 얼굴 표정에서 대충 심증을 얻는다. 하지만 남편이 실망할까 봐 몇 고개를 더 간다. ‘그 사람이 금방 당신을 알아 봤어?’  ‘당신, 그 사람보니까 반가웠어? ’‘할 말이 많았어?‘’까지 남편이 즐겁도록 빙빙돈다. 질문하는 나도 재미있다.
저녁 밥을 먹으며 미세즈 리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정말 많이 변했더라구. 뚱뚱해지고 말이야.”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 처럼 장황하다. 뿐인가  “그 집 큰 애 생각나? 방방 뛰던 애. 그  애가 변호사가 되었데. 근데 미국여자랑 결혼 했다네. ' 그 집 며누리 이야기까지 줄줄이다. '처음엔 미세즈 리가 무척 반대했다는가봐.' 그리고는 우리 애들 결혼까지 비약을 한다. 
한 모금 와인에서 우리 주변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의 진한 맛이 돈다.



우리 가족 고향 나들이

                                                                                              
온 가족이 한국을 가기로 했다. 직장 생활하는 아이들과 10년 만에 가는 남편이랑 다 같이 가는 거다. 이렇게 네 명이 다같이 한국엘 가는 건 처음이다. 갑자기 수 만가지로 생각이 얽혀든다.
미국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 내 인생의 에필로그가 지금부터 쓰여지는가 싶다.  
아이들이 아이덴티티로 마음 고생했던 것을 애들이 다 커서 슬쩍 흘리는 말에서 알아 채고는 가슴이 저렸지만, 나부터가 아이덴티티를 두고 갈등을 하다 보니 매사에 우물쭈물하는 모습만을 애들에게 보여주며 살아왔다. 다시 도리켜 봐도 별 수도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한국에 가서 어딜가나 자신만만한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여 주자. 아이들도 자기들의 뿌리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챤스가 될 것이다. 
지난 설날에 집에 온 애들이 베케이션을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갔다가 땀띠가 가득나서 왔던 아들이 2년 전에 미국인 친구랑 한국으로 여행갔다 오고 나서는 한국은 그저 엄마 아빠의 고향이라는 생각에서 달라진 모양이다. 강남스타일에 힘을 얻었는가? 아이들이 부쩍 한국에 관심을 갖는다. 몇 년 전에 회사 일로 며칠 한국을 다녀 온 딸도 한국에 또 가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끼어 들었다. 그럼 우리 다 같이 갈까? 했다. 속셈이 있는 발언이었다.
  작년 가을에 어머니를 보러 갔다가 하루 씩 더 늙어가는 어머니를 두고 오면서, 모든 일 제쳐두고 또 와야지 속으로 다짐하고 있던 차다.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한국 TV에서 전국 날씨 정보까지도 시청하는 남편은 결혼 생활 30년 간 딱 두 번 한국을 다녀 왔다. 돌 하나로 새 여러마리를 잡겠다는 마음이다.
  다 같이 한국 가자라는 말에 남편은 '글쎄,그럴까?' 했고, 덥기 전에 가자고 하고, 회사 일로 눈코 뜰새 없는 딸도 베케이션 씨즌을 피해 가자고 했다. 그렇다면 5월이다. 꽃도 보고, 님도 보고. 애들에게 너희 부모가 이렇게 말도 잘하고 어딜가나 환영받는 사람이다를 보여 줄 챤스가 왔다. 자신만만하게 앞장 서서 서울 거리를 활보해야지. 
애들은 한국에 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부모들이랑 얼굴을 맞대고 있을 것이 걱정인가보다. 딴 호텔을 잡자고 한다. 디즈니 랜드를 데리고 갈 때의 그 애들이 아니다. 남편은 그게 어디 될 말이냐며 아들이 호텔 포인트를 써 주겠다는데도 방이 둘 있는 콘도를 얻자고 한다. 한국에 간김에 일본도 구경하자는 애들, 언제 거기까지 가냐는 남편. 아직 짐도 싸지 않았지만 각자의 의견을 맞추고 타협을 해야하는 우리 가족 왈가왈부가 연장이 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내 주장은 피지않는다. 친정 어머니한테 어른이 다 된 아이들도 보여 줄 일에 가슴이 부푼다. 우리 가족끼리만 질리도록 같이 다닐 수 있다는 일이 꿈만 같다.
이렇게 우리 가족의 고향 나들이가 정해졌다.  
웬만한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있는 남편의 이번 여행 준비는 옷을 사는 일부터다. '그래도 좀 깨끗하게 하고 가야지.' 10년 만에 보는 친구, 가족들에게 보일 자기 모습에 신경을 쓴다. 
나는 동생들에게 줄 선물에 더 신경을 쓴다. 지금 중년 여성들이지만 내겐 미국으로 떠나버린 언니를 야속하게 생각했을 애틋하기만 한 어린 동생들이다.
애들이 외 할아버지 산소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작년에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 산소에도 가야겠다.
이모들 고모들 양쪽에서 벌써부터 자기 집에서 식사하는 날짜를 잡자고 연락이 온다.
어제는 모자 쓰기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줄 채양 넓은 모자를 샀다. 
소풍 전 날 밤 하늘을 내다 보던 그 마음이 된다.







비가 오면

비가 오면


나의 강인한 의지력이나 지혜로운 판단력이 힘을 못 쓴다. 이 모든 것이 아무 소용 없다. 날씨 앞에서는 오로지 순종 밖에 없다.
소풍 가기 전날 밤  과자가 든 배낭을 머리 맡에 두고 제발 비가 안 오길 바랬던 간절함이 다음 날 아침 얼마나 여러번 무너졌었는지. 내가 용띠라서 그렇다고들 했다. 우리 학년에 용띠 말고 뱀띠도 있었고 토끼띠도 있었을텐데, 선생님은 무슨 띠였을까?
결혼식에 비가 오면 좋다고도 한다. 야외 행사 때 비가 안 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고 한다. 인간의 사정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날씨에게 사람들이 붙이는 해석들이다. 1950년대, 60년대에는  믿지 못할 일을 두고 ‘때때로 곳에 따라 비가 내린다.’는 식의 일기 예보에 비유하기도 했다. 오후에 비가 온다며 친절하게도 우산을 들고 나가라고 권하는 아나운서의 말이 맞을 때 보다는 하루종일 들고 다니던 우산을 놓고 들어온 적이 더 많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항상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인다. 과학이 발달할 수록 날씨를 가늠하는 수준도 올라갔다. 열흘 앞을 내다보며, 하루 중에도 시간 단위로 몇 퍼센트의 비가 올거라는 예측까지 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바로 내일 날씨도  믿을 수 없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골프가기 며칠 전 부터 남편과 나는 날씨를 살핀다. 비가 올까 안 올까 궁금해 하는 두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이웃이 부추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가기로한 부부동반 골프 였다. 일기예보에 화수목금토 내내 비가 오는 그림이 떠있다. 이걸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비가 와서 안 가게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남편은 비가 와서 골프를 못 갈까봐 걱정을 한다. 일기 예보를 살피는 두 사람의 심정은 시시각각 바람에 흔들린다.
비가 온다던  화요일은 꾸물꾸물하기만 하고 비는 오지 않았다. 수요일엔 비가 왔다. 남편은 에이~ 하면서 스마트 폰을 연다. 계속해서 금요일까지 하루 종일 비다. 그리고  토요일은 이른 아침까지만 비 그림이 그려져있고 나머지는 해다. 그렇다면 토요일 낮부터 개인다는 소리다.  비가 안오면 골프를 쳐야 겠지? 그러면 할 일들을 미리 다 해두어야만  하는데, 토요일도 비라더니. 다시 컴퓨터  Weather.com을 찾아 보고 다시 스마트 폰을 열어 본다. 저녁에는  TV 일기예보까지 본다. 
비가 안오면 골프를 가는 거고 안 오면 못 가는 건 정해진 일인데도  골프 갈 준비는 하지 않고 하릴없이 여기저기 일기예보를 살핀다. 미리 좀 알고 싶은 거다. 아니 비가 확실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실력이 전혀 늘지 않는 골프 치는 그 긴 시간이 나는 아깝기만 했고, 남편은 모 처럼의 기회가 좋기만 하다. 한창 나이에 가게를 운영하느라 그 좋아하는 운동을 못한 남편이 얼마 전부터 다시 골프를 시작하 것이다. 더구나 싫다는 나에게 억지로 골프를 치게 해놓고는 처음으로 와이프 까지 데리고 가는 골프이니, 기대가 클 것은 분명하다. 
일기예보라는게 사람을 웃읍게 만든다. 폭풍이 온다고 요란하게 경고를 해서 집안 유리창에 테이프를 붙여두고 잔뜩 대기하고 있었지만, 빗방울 좀 떨어지다 만 적도 있고, 갑자기 비바람에 나무가 뽑히고 온 동네 전기가 나가는 일을 겪기도 한다.  생명을 나뭇잎처럼 날려보내는 태풍과 폭설과 천둥번개, 바싹 타들어가는 가뭄 앞에서는 그야말로 벌레보다 못한 인간이다. 겨우 골프 가는 일로 이러구 있는 내가 한심하다. 남편을 위하는 아내 역할을 하려고는 했지만, ‘비가 오는데 어떻게 해.'라는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던 것이다.
비가 온다던 목요일에 비가 오질 않자 남편은 아이폰을 들여다 보며 더 초조하다. ‘어허, 내일부터 또 비가 오는걸로 나오네.’ 그 마음을 알것 같다.
드디어 골프 가는 날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찌푸둥둥 하던 날씨가 갑자기 밝아진다. 두꺼운 구름 사이로 해가 나타나더니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 간다. 부엌 창밖으로 하늘을 바라 보다가 불현듯 며칠 동안 억메어 있던 날씨를 툭 내려 놓는다.  
비가 안 오면 남편은 신이 날꺼구 나는 모처럼 순종하는 아내가 되니 이 아니 좋은가.  비가 와서 골프를 못 치는 대신 남편은 하루 종일 낮 잠 자며 잘 쉬면 된다. 아침에 개이고 나중에 골프 장에서 비가 내린다? '까짓거. 비좀 맞지 뭐.' 무슨 큰일이라구.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인간이 어찌 날씨 타령까지 하랴.

나의 치킨 수프

나의 치킨 수프


사위가 오면 씨 암탁을 잡는다고 하는 말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닭 요리는 한국 사람들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즐겨 먹는 맛있는 음식이다.  
말간 국물에 닭고기 몇조각 들어있는 치킨 수프는 미국사람들에게는 싸고 맛있으면서도 피곤을 풀어주는 음식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훌훌 불어가며 떠 먹다가  마지막 국물을 드리마실 즈음이면 뱃 속이 든든해지고 기분 까지 풀어 주는 것이 바로 치킨 수프이다. 
그래서인가 '영혼을 위한 치킨 수프(Chicken Soup for Soul)’ 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자리에서 물러 설 줄을 몰랐다. 매말라가는 인간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짧은 이야기 모음 집 책 제목을 ‘치킨 수프’로 한 것은 정말 스마트한 발상이다.
틴에이져를 위한 치킨 수프, 부모들을 위한 치킨 수프, 하다못해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 쵸코렛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치킨 수프 등등 시리즈가 이어 졌었다. 어느 날 치킨 수프 책의 유행도 다 지날 즈음에 뒤 늦게 나의 치킨 수프 이야기가 생겼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닭을 삶아 끓여서 만든 명실공히 치킨 수프 이야기다.
31세에 낳은 딸 희련이는 어릴 때부터 누가 뭘 해주려고 하면 ‘내가, 내가’하면서 모든 일을 자기가 하려고 했다. 웬마한 일은 척척 알아서 해내니까 늙은 엄마로서는 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아이가 무척이나 여리고 예민한 성격임을 대학생활을 견디지 못해 1년 만에 휴학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야 알았다. 바쁘기만 한 엄마의 인정을 받고 싶은 어린 마음이 ‘내가 할래’로 표현되었었나 보다. 냉장고에 있는 콜드 컷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라고 하면 냉동실에서 떡국 떡을 꺼내 떡국을 만들어 동생을 멕이기도 했다. 이런 딸이니까 무슨 일을 해도 당연히 여기고 ‘우리 딸 잘 한다.’는 말을 별로 해주질 않았다. 
지나치게 Cool한 엄마에게 마음껏 부리지 못했을 응석을 이제라도 받아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응석을 부리지를 않았다. 더 이상 엄마가 해 줄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홍역을 치루 듯 늦은 사춘기를 겪어 내고는 또 다시 ‘내가 할께.’모드로 대학을 잘 마치고 회사를 다니고 있는 딸에게 다 못한 에미라는 굴레가 걸그적 거린다. 그러던 지난 겨울이다. 희련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 회사를 쉰다고 했다.
뭐라도 해줄 일이 있나하고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맨해튼에 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딸한테 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을 올라가니 “엄마 안와도 되는데...” 문을 여는 딸의 부시시한 모습이 생각보다 심한 것 같다. “누워 있어라.” 되돌아서 쭈루룩 층계를 내려 왔다. 불현듯 닭 국물을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난것이다. 그새 눈이 살살 내리기 시작한 로워 이스트 사이드 거리를 뛰다시피 ‘홀 푸드’마켓으로 갔다. 가즈런히 진열된 수십 종류의 닭고기 중에서 하나를 사들고는 또 뛰었다. 헉헉대며 아파트로 돌아와서는 손 빠르게 닭을 불에 올려 놨다. 
휴~ 힘이 빠진다. 누워서 랩탑을 들여다 보고 있는 딸 옆에 가서 누웠다.
‘아이고 우리딸.' 두 팔로 딸을 꽉 안아 준다. 딸은 컴퓨터를 덥고 내 가슴에 파고 들며 응석을 부린다. 킥킥 웃고 시시덕 거리며 서로 응석을 부리다가 국물 넘치는 소리에 벌떡 일어 났다.  파를 송송 썰어 그릇에 담아 놓고, 어느 새 컴퓨터를 열고 일을 하고 있는 딸에게 ‘닭 국물 좀 먹어라. 뜨거울 때 먹어야 되. 그래야 감기가 빨리 떨어 진다.’고 재촉한다.
오후에 딸의 집을 나서서는 천천히 지하철 역을 찾아 걷는다. 눈은 그쳐 있었다. ‘아마도 네가 나보다  치킨수프를 더 잘 만들수 있겠지. 그러나 엄마가 끓여준 건 또 좀 다르지.’ 속으로 말한다.  바람이 찬 줄도 모르고 걷는다. 
딸을 위해 끓인 치킨 수프가 에미 노릇을 한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림 그리기

그림 그리기


어릴 때 부터그림을 잘 그렸다. 가장 오래된 기억 중에 하나는 누런 전등 아래서 누런 시험지에다 그림을 그리던 일이다. 학교 들어가기 전 일이다. 어머니는 아예 시험지 한 뭉치를 상 위에 놔 두셨다. ‘여기다 그려라.’ 였다. 아니면, 어머니의 오래 된 스케치 북에내가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스케치 북이 나에게는 재미있는 그림 책이었다. 장 마다 몇 줄 글과 함께 수채화가 그려져 있다. 연필로 아웃트 라인하고 연하게 물감을 입힌 자주빛 자켓을 입은 여자 그림 옆에 써 있던 ‘까마기가 아옥 아옥”이란 글자가 눈에 선하다. 까마귀는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아옥아옥이란 말이 좋았었다. 우리 집안의 역사적 자료가 될 귀한 페이지 빈 자리마다 나는 크레용으로 마구마구 그림을 그렸다. 어두워지면 나가 놀지도 못하고 그저 그림을 그린 것이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반 아이 한 명이 뽑혀 칠판 앞에 서있고 우리는 그 애를 그렸다.선생님은 내 그림을 높이 들어 애들에게 보여 주셨다. 나도  내 그림이 그 아이와 참 비슷해서 놀랐다. 그 애가 입었던 병아리 색 스웨터를 노란 색에 흰 색을 섞어 나타냈었다.
교과서 여백이나 노트 북은 그림으로 채워진다. 여학교 때엔 아예 노트 장에 네모 칸을 치고 만화도 그렸다. 쉬는 시간이면 내가 수업시간 동안 몰래 그린 스토리가 어떻게 되었나 내 자리로 몰려 들었다. 미술대회에 나가 입선과 가작을 했고, 여학교 내내 미화부장을 했다. 미술 대학에 갈수 밖에 없었다. 다른 공부는 못했으니 다른 길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림을 안 그린다. 하지만 늘 그림을 가까히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전시회를 취재하고 화가들을 취재했다. 우리 집 벽에는 다른 사람들의 그림들만 걸려 있다. 왜 나는 그림을 안 그리고 있을까? 미술 대학을 다녔고 미술을 가르쳤으며 또한 뉴욕에 와서도 몇 달간은 그림학교를 다녔다. 그림을 못 그리는 이유가 뭘까. 그것이 의문이다.
이제라도 그림을 좀 그릴까? 심심하지 않도록 노후대책으로 그림을 좀 다시 시작해볼까….를 반복하면서도 시작을 못한다.
왜 그럴까. 악보를 익혀야하는 악기 연주와는 다르다. 혹시 잘 그릴 자신이 없는 것일까. 하얀 공백 위에 무엇이든지 내 맘대로 그리면 되는데. 외어야 될 공식도 없고 정해진 법도 없다. 잘 못 그렸거나 맘에 안들면 고치면 되는 것이 그림 그리기다. 언제건  맘이 내킬 때 그리면 된다는 또 하나의 자만심일까. 
사실은 대학 들어갈 때부터 그림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실력이 좀 모자르지만 등록금이 싸고 이름도 좋은 서울대학을 가려고 가장 댓수가 약한 조각과를 지망했었다. 그러나 막상 2차 대학인 홍익대학에는 댓수가 제일 높은 응용미술과를 선택했다. 상업적 그림에는 취미가 없었지만 취직이 잘된다고 해서였다. 대학 1학년 뎃상 시간에 교수님이 하신 말씀 “네 그림은 르노와르 같다.” 에 우쭐했던 기분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돈이나 이름을 생각지 말고 그냥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어야 했었나 보다.
졸업 하기도 전에 조경(landscape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하니그림은 자연히 또 밀렸고, 환경 기사자격증을 따고 환경 디자인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는 지방에 있는 대학의 공예과 교수가 되어 도자기를 만들며 시골로 여행다니느라 세월을 보냈다. 뉴욕에 와서 몇 장의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결혼과 함께 그림은 내 인생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슬슬 그림으로 마음이 간다. 뭐든지 그리고 싶다. 뭐든지 다 잘 그릴 것 같다. 뉴욕에 와서 잠시 아트 스튜던트 어브 뉴욕 미술 학교를 다니며 서양여자를 모델로 그린 자그마한 유화를 볼 때마다 이걸 내가 그렸나 한다.
 나의 후손들이 우리 집의 역사라면서 간직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겠다.
어릴 때 처럼  밥 먹고 나서 할 일이 없어서 그림만 그릴 때가 다가 오는 가보다. 그림그리고 싶은 마음이 짙어진다.

2011년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문인극 대본/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등장인물 :   앙드레 지드, 나레이터, 시인 1, 2, 3, 4, 5, 6 …가수, 무용수 장면 :   거리의 카페 …테이블, 의자, 가로등… 정원 ….꽃, 화분, 벤치  숲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