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대신 잡풀을
법정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책 꽂이에서 누렇게 바랜 ‘물소리 바람소리’를 꺼내 봤듯이, 박완서 씨가 돌아가신 후에 그분의 산문집 한권을 얻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박완서 씨와는 달리 잔디에 난 잡초 뽑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내가 생각했던 박완서 씨와는 달리 잔디에 난 잡초 뽑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어딘지 서민의 냄새가 풍기는 그분의 이미지와 잔디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누가 뭐래도 한국하면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의 금잔디다. 집 마당에 있는 잔디는 아니다. ‘고향의 푸른 잔디여...’를 외쳐 부르던 조용남의 노래에서는 뒷 동산 잔디밭이 생각나지만, 탐 죤스가 green green grass of home...할 때에 그린 그래스는 미국 어느 집에나 있는 잔디 밭, 그 이미지랑 딱 맞는다.
우리 집 마당도 잔디로 되어있다. 천편일률적으로 개성 없는 푸른 잔디다. 나는 잔디가 맘에 안든다. 온 정성으로 손질되어 깔끔하기 이루 말할데 없이 반듯한 잔비 밭을 보면 초록색 비닐 카펫처럼 보여 정이 안든다. 박완서 씨가 아침에 눈 뜨자 마자 마당에 나갔다가 열시 넘는 시간까지 잔디에 난 잡초를 뽑는다고 하셨듯이, 집집마다 잔디 밭은 주인의 손에 달려 있다.
우리 앞 마당 잔디는 겨우 이웃의 눈총을 피할 정도로 남편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초 여름 민들레가 우거질 시즌이면 남편은 출근하다 말고 그 짧은 시간에 후닥닥 민들레 몇 송이를 뽑아 낸다. 어느 날은 느닷없이 잡초 죽이는 약을 사다 마구 뿌린다.
하이웨이 가장자리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과 마당 한구석에 미안한듯 숨어 핀 자잘한 꽃들을 좋아하는 나는 잔디에 핀 민들레와 연보라 클로버를 절대로 잡초라고 부르지 않는다.
제발 꽃을 좀 놔두라고 해도 남편은 잔인하다. 한 번은 뒷 마당 잔디에 난 풀을 드려다 보다가 깜작 놀랐다. 잔디 깍는 기계가 지나간 그 밑에 팥알보다 작은 산딸기가 빨간색구슬처럼 쪼로록 매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봄, 두껍게 얼어 붙은 눈 더미 속에 석달 넘게 눌려 있다가 서서히 드러난 초라한 잔디밭을 내다보며 저걸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던 터라, 박완서 씨의 잔디이야기가 새삼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앞 마당은 감히 건드릴 수 없다쳐도, 뒷 마당이야 왜 내 맘대로 못할까. 이사왔을 때 조그맣던 나무들이 고목이 다 되어가니, 땅도 나쁘고 그늘도 진다. 해마다 어김없이 저절로 돋아나는 텃밭의 부추도 이제는 몇 오라기가 돋아날 뿐이다. 그렇게도 열심히 공을 들였건만 야채 농사는 내 분야가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제 농사는 졸업을 할까 한다. 그리고 그냥 꽃 밭을 만들면 어떨까. 어린 시절, 어머니는 그렇게 여러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매번 꽃밭부터 만들었다. 채송화, 나팔꼴, 봉선화, 백일홍, 분꽃, 꽈리나무, 코스모스, 한련, 해바라기. 수세미 덩쿨과 유자 덩쿨….정능 집에는 깻잎이 있었고, 컴푸리라는 약초도 있었다. 한 구석에는 쑥도 자라고 짙은 보라색 할미꽃도 피었었다. 모든 꽃들이 아무런 규칙과 이론도 없이 잡초들과 어울린 자유분방한 마당이었다. 지금 목동 아파트 1층에 사시는 어머니의 작은 뒷 마당에도 수십 종류의 나무와 꽃과 채소들이 비밀의 정원을 방불케 한다.
나도 그런 마당을 만들어보고 싶다. 우선은 남편과 맞서야 한다. 지난 해 가느다란 감나무 하나를 뒷 마당에 심으며 남편과 싱겡이를 벌인 이유는, 나는 나무가 커 가면서 실컷 가지를 뻗도록 잔디밭에 심자고 했고, 남편은 잔디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벽에 바짝 붙여 심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남들 처럼 잔디를 파랗게 가꾸지 못하는 남편이다.
'그래, 잔디가 뭐 대수냐. 차라리 잔디보다는 잡초다. '
남편을 이겨내고 저 초라한 잔디 밭을 과감히 없애자. 박완서 씨도 ' …어디서 날라왔는지 하룻밤 새에 잡풀이 자라 꽃까지 피우는 생명력이 경이로우면서 끝 없는 노동력에 맥이 빠지면서 ‘내가 졌다.’라며 백기를 든다…...'라고 했다.
그러자. 아예 뒷 마당 잔디 밭에 잡풀과 잡초가 마음껏 자라도록 내버려두자.
풀들이 어떤 모양으로 자라, 어떤 꽃을 피우는지를 한 두해 두고 보다가, 사이 사이로 자갈을 깔아 길을 내고, 나무 밑에는 의자를 놓자. 언 땅을 제끼고 제일먼저 피어나는 히아신스서부터, 튜울립 그리고 옥잠화가 순서대로 피어나며, 한 여름엔 흰색 하늘색 노란색 잡초 꽃이 만발하는 꽃 마당. 아무런 표정도 없는 잔디가 아니라 갖가지 이야기가 꽃을 피우는 나 만의 마당을 갖고 싶다. 남편도 잔디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은근히 좋아하리라.
아침 커피를 타 들고 나무 밑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실천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일단은 마당 평면도를 그려 본다. 마당 한 구석에 점점 퍼지고 있는 도라지의 뿌리를 캐고 감나무에 열린 감을 세어 보는 나의 노후 계획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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