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와의 재회
그림 볼 줄 몰라요, 그림은 잘 모르겠어요. 자주 듣는 말이다. 나는 오히려 그림을 모른다는 말을 이해 못했다.
그림이라는 것은 보기에 좋고 기분도 좋게 해주면 갖고 싶어지고 집에 걸어 놓고도 싶은 것이지 그림을 아는 특별한 방법이나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느낌, 그 느낌이 좋으면 그냥 좋아하고 싫으면 싫어하면 되는 거'라고 자신있게 말해 주곤 했다. 이 자신감이 ‘엘 그레코’에서 흔들렸다. 그림은 알아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엘 그레코를 만난 것은 '프릭 콜렉션' 뮤지움에서 였다. 인턴 큐레이터 박종호 씨가 한국인 미술 애호가들에게 전시를 설명해주는 드믄 기회를 놏치지 않았다. 전시실에 들어 서자 어느 미술관에서나 흔하게 보며 지나칠 초상화가 몇 점 걸려 있었다. 박종호 씨는 한 벽에 나란히 걸린 두 점의 초상화 앞으로 안내를 한다. 하나는 당대의 유명화가 풀존이 그린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던 엘 그레코의 것이다. 그림이라는 것은 보기에 좋고 기분도 좋게 해주면 갖고 싶어지고 집에 걸어 놓고도 싶은 것이지 그림을 아는 특별한 방법이나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느낌, 그 느낌이 좋으면 그냥 좋아하고 싫으면 싫어하면 되는 거'라고 자신있게 말해 주곤 했다. 이 자신감이 ‘엘 그레코’에서 흔들렸다. 그림은 알아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뉴욕 타임즈에서 ‘ 갑옷을 입은 남자들: 엘 그레코와 풀존 대면하다. (Men in Armor:El Greco and Pulzone Face to Face’ )란 제목의 이 전시를 호평한 이유는 대중적인 가치관과 영원한 예술성이 분명하게 비교가 되고 있기 때문이며, 수 백년 후 나란히 걸려 있는 두 사람의 작품이 수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기 때문이다.
엘 그레코는 고향 그리스(그레코)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했다. 내 이름을 '노한국'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보다 더 고향을 깊이 간직할 수가 있을까. 뿐 아니라 그 당시 정치와 종교세력의 물결을 타지 않고 자기를 고집했던 엘 그레코의 우여곡절의 인생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지금과 뭐가 다른가. 교황의 아들인 높은 지위의 군인을 그린 풀존의 작품은 사이즈가 더 크고 화려한 군복을 입은 잘 생긴 남자의 모습이 세세하고 정교하게 그려져있다. 엘 그레코 작품은 그와 정 반대이다. 촌부의 얼굴을 한 군인 아저씨가 그리다 만 듯한 단순한 배경 앞에 어정쩡하게 서있다.
성공하려고 로마로 유학을 온 엘그레코, 그림 값을 받아내려고 소송을 거는 엘그레코......박종호 씨의 설명을 들으며 지금 눈 앞에 있는 군인 아저씨의 얼굴에서 조차 열정과 현실에 번뇌하는 화가의 얼굴이 보인다.
바로 그 엘 그레코를 만났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번 만남은 재회가 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유럽 여행 갔을 때 스페인 톨리도라는 시골 성당에서 였다. 동전 떨어지는 ‘쨍그렁’소리가 하늘에 들려야 천당을 간다며 헌금함을 보여주던 여행 가이드는 커다란 벽화를 가르키며 ‘엘 그레코는 자기를 괴롭히던 신부 얼굴을 저기 저 아래 지옥에서 신음하는 사람의 얼굴로 그렸다.'고 했다. 그림 속 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따로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사실 모든 얼굴이 다 비슷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 말에서 우리가 명화라고 하는 그림들도 세상살이에 부대끼는 한 인간의 손으로 태어 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었다.
20년 후 또 다시 그 엘그레코의 얼굴을 봤다. 지위가 낮은 군인이 왠지 슬퍼보이고 왠지 고독해 보였다. 어쩌면 화가 난 표정이기도 하다. 돈 때문에 싫은 사람들과 얽힐 수 밖에 없었던 엘 그레코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처음에 그린 칼을 지우고 다른 방향으로 그렸기에, 자세히 보면, 첫번 그렸던 칼자루의 흔적이 보인다고 했다.
"그림 저 윗 쪽에 있는 저 자국은 뭐예요?"
"그건 아마 최근에 그림을 닦아 낼 때 물감이 좀 지워진 것일 수 있습니다." 지우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 명화에 친근감이 간다.
"과연 저 군인 아저씨가 이 그림을 좋아했을까요? 보통은 실물보다 좀 잘 그려줘야 하잖아요. " 마음이 풀어진 관람자들의 질문은 현실적이다. "그림 값은 받았을까요?" 벽에 걸린 400년 전 고고한 명화가 세속화 된다.
그날 밤 인터넷으로 알그레코 얼굴을 찾아봤다. 맞다. 그의 그림마다 있던 그 얼굴이다. 반가왔다. 아주 오래 전 관광객으로 만났던 엘 그레코를 뉴욕 시내 한 복판에서 구면으로 만난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건 그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되면 아는 사람을 만난 듯 기쁠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림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알아야 알아야 그림을 볼 수 있다.'고 말해 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자기와의 각별한 인연이 있어야 더 잘 알 수 있다고 덫 붙이고 싶다. 우리네 인생과 같은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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