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30, 2015

언니 노릇

언니 노릇


어머니 집에서 20분 쯤 걸어가 지하철 9호선을 타고 고속터미날에 내려 3호선으로 갈아 타고 다시 2정거장을 더 가서 내리면 역 앞에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셔틀 버스가 있다고 했다. 동생이 퇴근하고 온 다음에 서두루지 않고 떠나도 될 만했다.
다만, 고속 터미날 역에 그렇게나 사람이 많고 전철을 갈아 타러 가는 길이 그렇게 먼 줄을 몰랐다. 또 셔틀 버스가 예술의 전당 정문 앞이 아니라 맞은 편에 설 줄도 몰랐다. 인터넷을 보며 계획한 예술의 전당 내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8시 공연엔 좀 빠듯했다. 동생이 ‘언니, 이 앞에 순두부 잘하는 집이 있다는데, 거기서 저녁 먹을까?’한다. 그러면 우리의 우아한 밤의 분위기가 깨진다.  “아니야. 모짜르트 카페로 가자.” 예술의 전당안 깊숙히 자리잡은  '모짜르트 카페'를 찾아갔으나 30분을 기다리라고 할 줄은 기대 못한 일이다. 우리는 예술이 전당 안에 있는 또 다른 레스토랑인 '카페 벨리니'를 향해 온 길을 되돌아 뛰다시피 했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랑 30년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동생을 이번에 한국 가서는 근사하게 대접해 주고 싶었다. 잘 사는 나라 미국에 갔으면 비단 구두라도 사 갖고 올 줄 알았던 언니는 어쩌다가 한번 씩 한국에 와서는 손님처럼 여기 저기서 얻어 먹기만 하는 철부지였을 것이다.  항상 어머니에게 촉각을 세우고 사는 동생과는 푸근히 이야기도 하지 않고 한 열흘 머무는 동안 온통 친구들을 만나느라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훌쩍 미국으로 가버리곤 하는 야속한 존재였을 것이다.
한국엘 가면 공항에서부터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면서부터 마음이 풀어진다. 미국서 긴장하고 살던 어리광을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마음 껏 풀어 놨을 것이 틀림없다. 친정 어머니로 부터는 귀빈 대접을 받고 동생들로부터 고추가루며 된장에 조카에게 주라는 금일봉까지 받아들고 배터리를 팽팽하게 충전해 갖고 오곤 했다.
동생은 오랜 세월을 그런 나를 입 다물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뒤 늦게 철이 들었는지 그 동안 못 했던 언니 노릇을 하고 싶었다. 86세 어머니가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는 것 만큼 동생의 어깨가 늘어 지는 것이 보인다. 멀리 강남 사는 막내 동생도 아이들 대학 입시 뒷바라지에 친정 어머니 발 노릇까지 하느라 잠이 모자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런 동생들에게 어떻게 언니 노릇을 할 수 있을까.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음악 좋아하는 동생들을 음악회로 초대하자는 것이었다. A석 좌석에 멋진 저녁식사를 포함한 근사한 초대말이다. 갈 만한 공연을 찾았다. 때 마침, 이민 초기에 같은 교회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임헌정 씨가 지휘를 하는 음악회가 있었다. 안타깝게 수능시험 보는 딸 때문에 막내 동생은 빠졌지만, 우리끼리라도 하루 저녁을 즐기자는 데에 목동 동생은, 자기도 예술의 전당은 처음이라며 순순히 따랐다. 
그 옛날 대한극장이나 세종회관엘 갈 때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목동 가로수 길에 푹석하게 깔린 프라타나스 낙엽을 밟으며 동생이랑 고속터미날 역으로 걸어가는 나는 더 이상 한국에 온 손님이 아니었다. 사람이 꽉 찬 전철 안은 옛날 만원 버스 타던 기분이었다.
카페 벨리니에서 레드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계획했던대로 우아한 식사를 했다. 컨서트 홀에 에 도착해 안내를 받으며 무대 앞 가운데 자리에 앉고 나니 박수를 받으며 지휘자가 등장했다. 매주일 만나 맥주 마시며 놀던 지휘자에게서 지난 그 세월이 한꺼번에 풍겨왔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는 동생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고 있다. 지루할 줄 알았던  브르크너의 교향곡 한음 한음이 지휘자 손 끝을 따라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열열한 박수를 수 차례 받으면서도 끝내 앙콜 곡을 연주하지 않은 지휘자를 찾아 무대 뒤로 갔다. 
임헌정 씨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그냥 가려고 했지만 하도 지휘를 잘하셔서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요.”했다. 반가움을 교환하고는 아무 기약없이 헤어졌다.  
우리는 9호선을 타고 목동에 내려 또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늦 가을 싸늘한 어둠 속을 터벅터벅 걸으며 “언니, 언니….”  털어 놓는 동생의 넋두리에 ’그래, 그래.’하는 내 마음이 젖어든다. 엄청난 세월과 못다한 이야기들이 브르크너의 오케스트라 곡처럼 불협인듯 조화를 이룬다. 
“야. 어디 네 바이올린 좀 들어 보자.”
아버지가 밤 늦게 사오신 구운 옥수수 알맹이를 한 이불 속에서 너 한알 나 한알 세어 가며 먹던 동생. 내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타주던 내 동생이다. 우리 늘 이렇게 좀 살아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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